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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글자 조형의 원형과 미래

장주식∙(주)렉시테크 대표



  글머리에

  한글 조형 혹은 글자체에 있어서 오늘이란 무척이나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한글에 있어서의 오늘은 세로쓰기가 거의 사라져 버린 오늘이다. 그리고 한문과 같이 사용되어 그 조화를 이루어야 했던 한글이 영문이나 다른 라틴어 계열의 문자, 그리고 이슬람 계열의 문자와도 섞여 사용되면서 그 나름의 수준 이상의 타이포그래피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 오늘이다. 바야흐로 세계 속의 한글로서의 오늘이다. 그런데 21세기의 7년을 보내오면서도 우리 문화의 본질적인 문제이며 생활 속에서 함께하고 있는 이 문제는 한 번도 심각하게 논의된 적이 없음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여기서 오늘은 상황적이고 환경적인 것을 의미한다. 상황적이고 환경적인 것에 적응하여 살아남지 않으면 결국 도태되는 것이 생물 진화의 원리인 것처럼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면서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그 고유의 본질적인 문화적 정신마저도 상실당한 채 우리 곁에서 사라져 버리고 잊혀 버린다.

  1. 우리에게 원형으로서 한글 글자체는 존재하는가?

  문화에서 ‘우리 것’의 그 가치와 소중함은 굳이 짧은 지면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소중하다. 그런데 한글 조형성에 있어서 ‘우리 것’이 무엇인가 하고 질문해 본다면 우리 전통 의상에서 한복이나 색동저고리처럼 형상화하여 구체적으로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 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실종되어 버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의식하거나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의도적으로 찾아보지 않으면 못 볼 정도로 어디선가 숨어 스며들어 있는 것인가?
  우리 한글은 우리 선조들에 의하여 독창적으로 창제된 것이므로 그 원형 또한 우리의 문화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한글 창제 시대에 만들어진 훈민정음 해례본에 보이는 글자체에 해당하는 글자의 조형을 우리 한글 글자체의 원형이라고 쉽게 정의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을 원형이라고 정의한다면 지금 현재 사용되어지고 있는 바탕체 혹은 명조체의 글자체들이 한글 원형과 그 어떤 조형적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분석되고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계의 논리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글의 명조체 혹은 바탕체가 조선 시대에 유행했던 궁인 여성들의 붓글씨를 본받아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글 글자체의 원형은 조선 시대의 붓글씨인 궁서형 필사체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2. 한글 명조체란 정의는 가능한가?

  20년 전 학계에서는 지금 인쇄 출판의 본문체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한글 명조체(명조, 신명조, 윤명조, 산돌명조, 조선명조 등등)가 일본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비판이 일어났고 그 결과 이어령 씨가 문화부장관을 재직하였을 1991년에 학계의 의견을 참조하여 한글 본문 글자체의 이름을 ‘명조’를 대신해 ‘바탕’이라 재정의했었다.
  그리고 학ㆍ업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국가가 정하는 바탕체의 본을 만들어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199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문화바탕체’이다. 그런데 이 ‘문화바탕체’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문화바탕체’가 사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바탕이란 말과 용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바탕을 명조라는 이름으로 대신한다는 정책적 결정으로 인하여 이름 변경의 결정적 효과를 보게 만든 것은 컴퓨터(os)인 윈도였다. MS사의 윈도에는 기본 한글 글자체로 4개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바탕, 돋움, 굴림, 궁서이다. 여기서 바탕은 예전의 명조체 중 대표적인 것인 신명조에 해당하고 돋움은 구형 고딕1) 에 해당한다. 그리고 굴림은 나루체에 해당하고 궁서는 기존 궁서의 이름과 글자체를 그대로 사용했다.
  지금 사용되는 관례를 통해서 볼 때 바탕체는 명조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글 글자체에 있어서 명조체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의 원형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한글 글자체의 미래를 제시할 수 없다.


  3. 한글 명조체, 즉 바탕체의 연원에 대해

  명조란 ‘明朝’로 말 그대로 한다면 명나라 왕조이다. 이런 의미의 말이 글자체의 범주에 들어온다면 명나라 시대에 대표적으로 유행했던 필법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명조란 말을 금속 활자의 한자 글자체의 이름으로 명명했던 것은 일본의 활자 제작 회사였다. 그들이 자신의 글자체에 명조라는 이름을 붙인 근거로 명조 시대의 필법에서 그 본을 따온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으나 사실은 그렇다고 보기 힘들다.

<그림 1> 고딕체지만 클립이 있는 구형 고딕체인 돋움, 클립이 제거되어 단순성을 더 중시하는 신형 고딕인 윤고딕

  물론 명조 시대의 필법은 한자의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에서 심한 차이가 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이런 특징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 일본의 한자 글자체인 명조체이다. 그렇지만 필법이란 획과 획의 차이를 말하기보다는 시작점(부리)과 끝마무리(맺음), 그리고 획의 흐름의 변화를 가져올 때 표현되는 굴곡의 특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일본의 한자 명조체는 붓글씨의 필법을 따온 것이 아니라 펜글씨의 필법을 그대로 가져온 것에 해당한다.
  펜으로 쓰면 가로획은 가늘어지고 세로획은 펜이 두 갈래로 벌어지는 것에 의하여 당연히 두 배 이상으로 벌어진다. 일본의 한자 명조체는 이런 펜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일본의 회사가 이런 펜글씨의 필법에 따라 만든 이 서체에 명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중국의 명 왕조의 이름을 따옴으로써 그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문제는 이렇게 펜의 필법에 따라 만들어진 한자의 글자체가 대단히 단정하고 일률적이며 통일성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대단한 각광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런 미학적 보편성에 힘입어 일본의 명조체는 한국으로 그리고 대만을 거쳐 중국인들에게까지도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글 명조체라는 것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그대로 일본의 것을 모방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4. 한글 바탕체의 원형과 그 미래

  한글 명조체는 최정호 선생이 만들었다. 최정호 선생은 이미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명조라는 이름의 글자체명을 자신이 만든 활자의 이름에다 그대로 갖다 붙였다. 그는 일본이 그들의 활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명조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같이 그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활자의 이름에 명조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글자의 원형을 일본의 펜글씨 한자체가 아니라 한글 붓글씨 필법에서 가져왔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한글 명조체는 그 이름만 명조체이지 사실 일본의 한자 명조체와는 그 필법의 원형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한자의 경우는 일본의 명조체와 동일한 형식을 택하고 있다. 아니,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거나 베껴서 사용하는 것이 태반이다(한국 고유의 한자 명조체라고 만들어진 것이 올해 발표되었는데 그것이 조선일보 명조체 안에 들어 있는 한자 글자체이다: <그림 2>참조).

  <그림 2> MS 명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는 1:2 정도 된다. 가로획의 맺음이 삼각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로획의 시작점에서 우측으로 클립이 생기는 것 등이 펜의 필법의 특징을 원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고딕체에도 적용되는데 고딕체의 세로획 우측의 클립이 그 특징을 원용하고 있음을 대변해 준다.
  조선일보 명조는 펜의 필법의 특징으로 인해 한 획 내에서의 변화마저도 두 획인 것처럼 표현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일본의 형식적인 글자체에서 어문학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한자의 획수를 그대로 반영해야 된다는 논리에 입각하여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실 사자 밑 부분은 3점의 처리와 제 자의 머리 위의 점이 자연스럽게 처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법 자의 去(거)자 아래에 있는 받침 마늘 모가 실제로는 2획인데 일본 명조는 멋을 부리는 처리로 인해 3획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를 2획으로 서법에 맞게 보이도록 처리된 것이 조선일보 명조의 한자 글자체의 가치라 할 수 있다.


일본 서체 MS 고딕


일본 서체 MS 명조


조선일보 명조의 한자

<그림 2> 일본의 한자 명조체와 조선일보 한자 명조체의 비교


  일본 명조체에 있어서 히라가나나 가타카나 글자는 한자들이 펜글씨의 필법을 따르는 것과는 달리 붓글씨의 필법을 따르고 있다. 최정호 씨는 일본의 그런 점을 착안하여 한글 명조체가 붓글씨의 원형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과감하게 붓글씨의 필법을 한글의 명조체에 안착시키고 그 완성미를 도모했다. 그것이 일본 모리사와 사진 식자기에 실린 최정호의 모리사와 신명조이다.
  2006년 8월 정 모라는 대학교수에 의해 한글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는데 그 내용은 한글 명조체와 고딕체는 일본에서 만들어져 한국으로 수출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다음은 2006년에 나온 언론 기사 중의 일부이다.

  정 교수는 또 우리나라 국민들이 신문을 비롯해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명조체와 고딕체가 일본에서 개발된 서체라는 사실을 1970년께 인쇄기계 ‘사진식자기’를 개발, 한국으로 수출한 일본의 인쇄회사 모리사와사에서 확인했다.

  이런 주장은 MBC에서 특집 방송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도 비슷하게 소개되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가진 문화적 사고의 한계를 철저하게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모리사와 기계에 실린 신명조는 한국인 최정호라는 예술가가 만든 서체이다. 그것이 일본의 기계에 실렸다고 해서 일본의 서체가 된다는 그런 사고를 어떻게 일반인도 아닌 교수라는 직위를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며, 그것이 어떻게 국민들에게 모르는 사실을 알려 주는 사실인 것처럼 기사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인 음악가의 연주가 독일인의 기술에 의해 음반에 실리면 그게 독일음악이 된다고 하지 않는다. 안익태의 음악이, 윤이상의 음악이 스페인과 독일 회사의 음반으로 나와도 그것을 스페인의 음악이나 독일의 음악이라고 하지 않는다. 일제 시대의 한국 가수의 노래 아리랑이 일본 회사의 음반으로 나왔어도 그것을 일본 음악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체의 경우는 분명히 한국인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본의 기계에 들어갔다고 해서 일본의 것이라고 말하는 지식인들의 논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한글 명조체, 즉 바탕체의 원형은 무엇인가? 그것은 명조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한글의 붓글씨, 그것도 단아하게 궁서처럼 일관적인 부리와 맺음을 가지고 쓰인 글씨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원래 명조가 아니었으므로 그 서체의 이름을 바탕체라고 바꾼 것은 정작에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 벌어지는 미래이다. 이전까지의 글씨체는 세로쓰기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한글이었고 가로쓰기에 맞추어진 한글은 그 조형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였다. 한글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지만 그 쓰기에 있어서는 중국 한문과 일본의 문장과 달리 띄어쓰기가 있다. 그래서 한글이 그 짜임새를 가지려면 고정 폭보다는 글자의 형태적 성격에 따라 다른 폭을 가지는 가변 폭이 되어야 한다.
  각 글자가 얼마만큼의 가변 폭을 가져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 그리고 주된 독서의 장이 책이라는 종이에서 컴퓨터 모니터라는 디지털 화면으로 바뀌어 버린 시대에 그 화면 위에 한글 고유의 조형적 특성을 가진 서체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말 시급하게 연구 개발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