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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우∙서울신문 교열팀 차장



  1. 누구를 위한 영문 이니셜인가


  신문에서 영문 이니셜은 단순히 참고용이 아니다. 괄호 안에 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다시 밖으로 나온다.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된다. ‘UNIFIL’은 ‘레바논 유엔 평화 유지군’이다. 대체로 처음에는 ‘레바논 유엔 평화 유지군(UNIFIL)’식으로 적고 다음부터는 ‘UNIFIL’만 사용한다. 따라서 글의 뒷부분에 ‘UNIFIL’이 나오면 다시 앞쪽을 봐야 이해하는 독자도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UNIFIL’을 문자가 아닌 단순 기호로만 인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읽는 방법을 놓고는 갈등도 빚는다. ‘유엔아이에프아이엘’이라고 읽어야 하는지 ‘유니필’이라고 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앞쪽을 선택하기엔 길어서 부담이 따른다. ‘유니필’을 생각한 독자는 이렇게 읽어도 되는지를 두고 멈칫한다. 결국 우물거리는 형태로 지나가기 쉽다. 아니면 눈으로 보기만 하고 ‘레바논 유엔 평화 유지군’이라는 의미를 겨우 찾아 이해하고 넘어가게 된다. 유엔 아동 기금(UNICEF),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석유 수출국 기구(OPEC) 등도 같은 방식의 표기가 대세를 이룬다. 이어지는 문장들에서는 영문 이니셜만 나온다.
  영문 이니셜로 표기하는 용어가 빠르게 늘고 있다. 의미전달은 더디거나 모호해져 간다. 모든 상황에서 영문 이니셜은 절대적 위치를 차지한 듯하다. 외국 기업체 이름이나 상품명은 더욱 그렇다. ‘TGV’, ‘BMW’는 곧바로 드러낸다. 한글과 대비돼 뚜렷하게 강조되는 효과를 본다. 각각 프랑스 고속열차, 독일 자동차 회사 이름이다. 그러나 어떻게 읽으라는 것인지 알려 주지 않는다. 독자들이 알아서 읽으라는 식이다. ‘테제베’나 ‘베엠베’로 읽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티지브이’나 ‘비엠더블유’라고 할 우려는 없을지,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닐지는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하다.
  영문 이니셜은 인명에도 등장한다. 해당되는 사람은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것은 권위주의의 산물이다. 한때 유력 정치인들 가운데는 영문 이니셜로 표기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YS, DJ, JP 등의 표기는 하나의 정치 문화로까지 비쳐진다. 지금 영문 이니셜로 표기되는 사람은 대선 주자 반열에 오른 것을 뜻한다. 최근 들어 줄긴 했지만 여전히 DY, GT, MB 등의 표기가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굳은 표기처럼 돼 버린 YS, DJ 등과 달리 전달 효과가 떨어진다. 아는 독자들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신문은 불필요한 권위를 달아 어렵게 하고 싶어 한다.
  1990년대 초반 세계화 바람은 영어 열풍을 더 거세게 일으켰다. 영어식의 각종 이름과 영문 이니셜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LG, SK, KT, KB, KTF, CJ, S-OIL 등 많은 기업체가 이름을 바꿔 달았다. 세련미와 신뢰감을 준다는 이유도 붙였다. 신문들은 이들을 ‘엘지’, ‘에스케이’, ‘케이티’…… 등으로 읽지만 표기는 대부분 로마자로 한다. 기업체가 하는 대로 따른 것이다. 신문 표기로 어떤 것이 정당한지를 놓고 고민한 흔적이 거의 없다. 당연하다는 듯이 획일적으로 로마자를 선택했다.
  신문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매체다. 일부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쉽게 소통될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표기 수단인 문자도 되돌아봐야 할 요소다. 현재 우리나라 신문에 쓰이는 문자는 한글, 로마자, 한자, 아라비아 숫자 등 무려 네 개나 된다. 한글이 주 표기 수단이고 나머지는 보조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한자어를 대신해 영어를 중심으로 한 외래어가 급속히 자리잡으면서 표기 수단인 로마자의 위세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리 신문들은 로마자를 단순히 한글의 보조 수단을 넘어 종종 중요한 자리에 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문 이니셜이다. 영문 이니셜은 때로 남발되면서 영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도록 안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소통을 어렵게 한다. 많이 익숙해져 있지만 한글과 로마자를 섞어 쓰는 게 항상 자연스러운지 따져 볼 일이다. 독자를 배려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일 때가 많다.


  2. 객관적인가

  객관성은 신문 기사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신문이 신뢰를 얻는 바탕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 기사의 객관성을 놓고 시비가 인다. 마찬가지로 따지고 보면 세부적인 언어 표현에서도 시빗거리는 많다. 종종 위험 수위를 넘나든다. 양치기 소년이란 소리를 듣지 않을까 우려된다. 최상급의 표현을 즐겨 쓰는 행태는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최첨단, 사상 최대, 최고조, 최정상급, 역대 최강, 최고 권위, 초강력, 초호화, 초강경, 초급매물, 초대형, 초박빙’ 등은 쉽게 찾아지는 표현이다. ‘첨단’이 모자라 ‘최첨단’이 되고, ‘박빙’이 성에 안 차 ‘초박빙’을 내세운다. 사실 대부분 ‘첨단’이나 ‘박빙’이어도 족하다.
  신문에 날 정도의 사항이면 평범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최’나 ‘초’ 자가 들어갈 만큼의 사건이나 상황이지는 않다. 이런 표현은 잠시 시선을 끌기는 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바로 간파해 버린다. 그러려니 하고 깎아내린다. 신문은 점점 더 강하고 새로운 표현을 찾는다.
  조금 문제가 생기면 ‘대란’이라고 한다. ‘살인적인 무더위’라든가 ‘살인적인 물가 상승’ 등의 표현도 서슴없이 사용한다. 축구 선수들은 종종 ‘전문 킬러’가 되고 ‘킬 패스’를 한다. 운동선수들은 대부분 한번쯤 ‘전사’가 되고 ‘비밀병기’란 용어로 ‘무기’가 된다. 물론 비유적으로 한 표현이다. 그렇다고 운동선수가 항상 전쟁터에 나가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래서 스포츠 기사는 승리 아니면 패배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기고 지는 결과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경기 과정과 결과에서 읽히는 선수들의 모습이 더 중요한 가치로 다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고 감동적인 표현들이 더 살아나야 한다.
  ‘폭탄’이라는 말은 이제 필수 용어가 되다시피 했다. ‘세금 폭탄, 물 폭탄, 부담금 폭탄, 건보료 폭탄, 교육 폭탄, 폭탄선언’ 등 폭탄이 쉴 사이 없이 터진다. 이제 ‘폭탄’도 일상적인 생활의 가운데로 들어온 느낌이다.
  ‘가장’은 ‘여럿 가운데 어느 것보다 더’, ‘여럿 가운데 으뜸으로’라는 뜻이다. 당연히 으뜸은 하나다. 따라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라는 식의 표현은 말이 안 된다. ‘가장 높은 산’, ‘가장 빠르다’가 일상적이고 올바른 표현이듯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평가 받는다”라고 하거나 ‘가장’을 빼는 게 적절하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이 자주 보이는 것은 사실을 과장해서 더 드러나 보이게 하려는 심리가 한몫한다. 이것도 습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난다. 더 정교해져야 할 언어를 무디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찔한 비키니, 육감적인 몸매, 섹시한 매력, S 라인, 근육질 남성.’ 다분히 선정적이다. 이러한 표현은 독자 대부분의 시선을 끈다. 선정성을 담보로 독자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거기서 그칠 뿐이다. 그 이상의 진실은 없다. ‘아찔한, 육감적인, 섹시한, 근육질’이란 수식어가 반드시 필요한 대목이었는지 헤아려야 한다. 신문 언어로서 적절한지를 살펴야 할 또 다른 부분이다.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표현들이 있다. 현실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은 객관성을 잃고 있다는 말이다. 어찌하다 보니 최하와 최상의 말들이 경쟁력 있는 것처럼 비친다. 그러면 중간 지대에 있는 다양한 말들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분법적 사고가 작용하게 하기도 한다. 일상을 과도하게 넘어선 표현은 신문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한다. 신문 언어가 일상에 끼치는 영향을 수시로 짚어 볼 일이다.

  3. 정확하고 공정한가

  오랫동안 남성 중심 사회가 이어져 왔다. 남성은 언어 표현에서도 늘 중심에 놓인다. 시집을 간다고 표현한다. 시집가는 행위는 여자가 결혼하여 남의 아내가 되는 일이었다. 사전이 이렇게 풀이한다. 남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남성은 여성을 책임지고 여성에게 지시하는 위치에 섰다. 언어는 쉼 없이 이를 인식시켰다. 공정성을 말하는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남성은 항상 남녀를 대표해 표현됐다. ‘청소년, 학부형, 소년 체전’에서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신문에서 남성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표기되지 않는다. 여성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여성 과학자, 여교수, 여성 골퍼’라고 표현된다. 과학자나 교수, 골퍼이기 전에 여성이라는 의미를 먼저 알린다. 과학자, 교수, 골퍼의 자격을 온전하게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말을 옮길 때도 남성과 달리 여성은 드러난다. 괄호 안에 ‘여’라고 표기된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도 거의 그렇다. 익명으로 처리돼도 여성은 드러내진다. 여성은 밖이 아닌 안에 있어야 할 존재라는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은 남성의 영역이었다.
  양성 평등을 지향하는 시대다.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여성 과학자, 여교수가 아니라 과학자, 교수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당하다. 불필요하게 의미 없이 여성을 드러내는 습관도 벌써 버렸어야 했다.
  ‘처녀’라는 말에는 성적으로 순결하다는 의미가 있다. ‘처음’, ‘첫’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성에게는 순결주의가 암묵적으로 강요된다. ‘처녀 출전’, ‘처녀 우승’, ‘처녀생식’, ‘처녀작’ 등으로 ‘처녀’는 등장한다. ‘처녀’는 여성의 성적ㆍ신체적 측면을 이용한 표현이다. ‘첫 출전, 첫 우승, 단성 생식’ 등의 표현도 있다.
  ‘미혼모, 과부, 복부인’ 등은 여성에게만 붙는 명칭이다. ‘미혼모’에게 사회가 보내는 시각은 부정적이다. 남성은 자유롭고 여성이 죄를 뒤집어쓴 꼴이다. ‘미혼모’라는 직접적인 호칭은 부정적 시각을 더욱 공고히 한다. ‘과부’도 부정적이긴 마찬가지다. 뭔가 흠 있는 사람이라는 취급을 당한다. 여성의 행위는 상대적으로 더 나쁘게 받아들인다. ‘복부인’이 그렇다. 국어사전은 ‘부동산 투기로 큰 이익을 꾀하는 가정부인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아무렇게나 쓸 명칭들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장애인을 대할 때 장애를 나타내는 표현은 금기시된다. ‘벙어리’, ‘귀머거리’, ‘언청이’라고 대놓고 부르지 않는다. 신문도 당연히 그러는 것이 옳다. 하지만 특정인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인지 가끔 보인다. ‘절름발이 행정’, ‘벙어리 냉가슴’, ‘꿀 먹은 벙어리’,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등 장애를 이용한 표현도 있다. 독자의 시선을 끄는 효과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들은 장애인들에게 폭력일 수 있다.
  바야흐로 지방 분권 시대다. 지방은 낮고 서울은 높은 데 있지 않다. 서울은 어디서나 올라가야 하는 시대도 지났다. ‘상경’한다거나 ‘지방으로 내려갔다, 서울로 올라왔다’는 표현은 세련되지 않았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됐다. 지방에 있는 대학은 대학이 아니고 굳이 지방대학이라고 부른다. ‘지방’이라고 붙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어도 종종 그렇게 부른다. 신문이 서울과 지역을 차별한다.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인사들이 하는 식사는 거의 조찬, 오찬, 만찬으로 쓴다. 반면 일반인들은 아침, 점심, 저녁이 된다. 조찬이나 만찬 대신 아침과 저녁도 먹여 주면 안 될까. 그들의 모임은 대부분 회동이고, 집은 자택으로 굳어 간다. 신문은 권위를 부여하는 하나의 틀을 만들고 있다.


  4. 지금 여기의 언어

  신문은 표준어에 민감하다. 신문 언어가 추구하는 것이 표준어이기 때문이다. 신문은 표준어를 널리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기라도 한 듯하다. 비표준어라는 신호만 보이면 기계적으로 표준어를 찾아나서는 습성이 있다. 나쁘게 말하면 소통의 차원보다 어문 규정에 맞추는 데 집착한다. 새로운 말이나 외래어에는 관대하면서 규정과 관련된 것이면 심하게 움츠러든다. 국어사전은 참고용이 아니라 거의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신문에서 ‘사랑이 뭐길래’라는 표현은 곧바로 ‘사랑이 뭐기에’로 바뀐다. 국어사전이 ‘-길래’를 ‘-기에’의 잘못이라고 풀이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어사전은 우리가 쓰는 말의 의미를 온전하게 옮겨 놓았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보편적인 의미만 담아 놓았을 뿐이다.
  말은 시간과 장소,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길래’는 틀린 말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갖는 말이 돼 버렸다. ‘-기에’가 간섭하지 못하는 영역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국어사전이나 규범은 변화들을 쉽게 담아내기 어렵다. 따라서 지금 여기의 의미보다 이전 저쪽의 의미들을 더 담고 있다. 신문이 담아야 하는 언어는 이전 저쪽이 아니다. 바로 여기 이 순간의 언어여야 한다.
  ‘먹거리’를 사전이 지시하는 대로 항상 ‘먹을거리’로 바꾸면 이전 저쪽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된다. 곧바로 온전한 소통을 막는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먹거리 장터’, ‘먹거리 문화’가 ‘먹을거리 장터’, ‘먹을거리 문화’로 대체되는 상황은 우리 언어 공동체에 어색함을 안긴다.
  ‘떨구다’도 마찬가지다. 국어사전에는 ‘떨구다’가 ‘떨어뜨리다’의 잘못이라고 돼 있다. 그렇지만 일상에서는 ‘눈물을 떨구다’, ‘고개를 떨구다’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눈물을 떨구다’는 슬프거나 아주 기쁠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고개를 떨구다’는 잘못했거나 미안한 마음이 있음을 알린다. 손에 들고 있는 볼펜을 떨어뜨렸을 때는 ‘떨어뜨리다’가 적절하다. ‘볼펜을 떨궜다’고 하지 않는다. ‘떨어뜨리다’와 ‘떨구다’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 단어다.
  이 외에 신문은 ‘오손도손, 뜨락, 손주, 먹거리, 바둥바둥, 맨숭맨숭, 곰살맞다……’ 등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국어사전은 틀린 말로 풀이하고 있다.
  신문 언어가 표준어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가장 잘 소통되는 언어여야 한다. 우리의 표준어는 많이 경직돼 있다. 유연하지 않다. 언어가 발전한다는 것은 더 섬세한 표현을 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문 언어는 표준어일까. 신문 언어는 또 하나의 방언이다. 신문은 더 잘 소통되는 표현을 선택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