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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의 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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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정신, 고독의 사상을 위하여 |
김재홍∙문학평론가
∙ 경희대학교 교수
1.
시작하며···
귀뚜라미 울음을 타고 먼 들녘에서 가을이 오고, 金과 銀으로 물들어 가는 단풍잎에 실려 가을빛이 짙어 갑니다. 그리고 투명한 달빛과 맑고 시린 물빛에 계절은 마냥 깊어만 갑니다. 이런 가을, 고즈넉한 밤에는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리는 가랑잎 소리를 들으며 조용조용 시를 읽고 싶습니다.
2.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또는 소멸의 가치화
남쪽에선 과수원에 능금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 「가을의 향기」 |
그대는 가을의 향기, 가을의 내음을 맡아 보셨나요? 그것은 이 시에서처럼 남쪽 과수원에서 능금이 익는 내음이기도 하고 저물녘 서쪽 하늘가에 노을이 타는 내음이기도 하겠지요. 아니면 먼 들녘에서 끼쳐 오는 들풀들의 시드는 향기이거나 장미들이 마르는 향기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요. 그런가 하면 섬세한 영혼과 가슴을 지닌 분들께는 눈물의 향기 또는 술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현대 시에서 유독 가을을 예민하게 느끼고 섬세하게 노래한 시인이 한 분 계시지요? 다형 김현승(茶兄 金顯承, 1913∼1975) 선생 말씀입니다. 개신교 목사이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태중 기독교인으로서 다형은 천부적인 퓨리터니즘과 섬세한 감수성을 특징으로 가을과 고독, 사랑과 기도를 집중적으로 노래하여 많은 분들에게 가을 심상을 인상적으로 부각시켜 준 분이시지요.
특히 인용 시 <가을의 향기>는 가을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가을의 두 얼굴, 계절의 양면성을 실감 나게 형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만과 소실, 풍성함과 쇠락함, 기쁨과 슬픔, 아름다움과 쓸쓸함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을은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처럼 결실에서 낙과를, 만남에서 이별을 아프게 체험하게 함으로써 모순성, 양면성으로 생의 본질을 절감하게 하는 계절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김현승의 시가 지닌 최대의 미덕은 이별의 의미화 또는 사라짐의 가치화라고 하겠습니다. 사라지는 것, 떠나가는 것, 스러지는 것, 약한 것, 상처받은 것, 죽어 가는 것들이 그냥 그렇게 무의미하게 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생명은 나름대로의 결실, 의미를 남기고 가는 것이기에 그것을 눈여겨보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데서 다형 시학의 가치가 놓인다는 뜻입니다.
3. 가을 정신, 사랑과 고독, 기도라는 운명의 형식
만남과 헤어짐, 충만과 소실, 완성과 소멸이라는 생명의 양면성 또는 모순성을 통해 소멸의 의미화 또는 가치화를 추구하는 다형의 시학은 사랑과 고독 그리고 기도라고 하는 가치 체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가을은 그 본성이 사라져 가는 것에 놓이기에 사랑을 갈망하게 되고 그 내면으로 고독을 절감하게 되고, 그러기에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큰 힘으로 절대자, 神에 대한 기도와 경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지요.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가을의 祈禱」 |
그렇습니다. 사라져 가는 계절, 추워 가는 시간, 죽음 상태의 겨울을 맞이해야 하기에 가을은 모든 지상의 생명 있는 것들에게 사랑을 갈망하고 염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겨울은 생명들로 하여금 동면 또는 죽음의 상태를 겪게 하는 것이기에 추위와 어둠, 고통과 절망의 표상으로 느끼게 하기 마련인 것이지요. 그러기에 따뜻하고 밝은 것으로 생명을 낳게 하고 자라게 하고 완성시켜 주는 힘으로 사랑을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들로 하여금 죽음의 상태를 벗어나서 재생과 부활을 느끼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가을은 그 어느 계절보다도 사랑의 빛과 따뜻함을 찾고 그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생명의 알파이고 오메가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생명은 혼자 태어나서 더불어 살다가 마지막엔 또 혼자 죽어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존재, 단독자의 원리를 지니기에 본질적으로 고독과 허무를 운명의 형식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가을은 그 어느 계절보다도 고독의 계절이고 홀로의 계절인 것이지요. 사랑과 고독은 그야말로 가을의 본질이고 운명의 형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와 무력함을 깨닫고 절대자에게 무릎 꿇고, 마침내 기도함으로써 정신의 구원,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사랑과 고독, 갈망과 기도라고 하는 생명의 본질 또는 운명의 근원적 형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형 시학의 깊이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4. 고독의 가치화, 고독의 사상
버리고 비우는 것으로 가을 정신이 다형 시의 내면 공간이라면 고독의 사상은 다형 시정신의 정수이자 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라지는 것, 버리는 것으로 가을 정신이 자유에의 길을 지향한다면 내면으로 회귀, 깊이의 정신으로 집중하는 것으로 고독은 인간 본질로의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神들의 巨大한 正義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堅固)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滋養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견고한 고독」 |
그렇습니다. 단독자로 한 세상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생명들, 특히 인간은 운명의 형식으로서 고독과 허무를 본질로 합니다. 혼자서 태어나고 홀로 죽어 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인간은 한평생 고독을 운명으로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기에 고독은 인간에게 “결정된 빛의 눈물”이며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피와 살”입니다. 아울러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굳은 열매”이자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독은 인간에게 있어 최후의 재산이며 神에게도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다형 시에서 주목할 것은 그의 고독이 상투화ㆍ피상화되지 않고 깊이 있는 정신의 광맥으로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탐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젊은 날의 눈물 젖은 고독에서 출발하여 중년의 메마른 고독, 견고한 고독을 거쳐서 장년의 純金의 고독으로 단련되고 심화되어 마침내 절대 고독으로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 「절대 신앙」 |
이러한 고독의 경지는 인간의 고독이 절대자의 그것으로 이끌어 올려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기에 이 지점에서 고독은 인간적인 것에서 靈性을 지니게 되고 神의 음성으로 한 발자국 더 깊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고독의 가치화 또는 고독의 사상이라고 불러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점에서 김현승의 시는 우리 시사에서 깊은 정신의 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5. 맺음말
그렇습니다. 다형 김현승 시어의 염결 지향성은 우리 근대 시사에서 하나의 깊고 맑은 우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현대 시사에는 큰 산과 우람한 봉우리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김현승의 시가 이 가을에 더욱 간절히 그리워지는 것은 그의 시가 오늘날 고단하고 목마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혼탁한 영혼을 정화하고 고달픈 마음을 씻어 주는 소중한 명상과 기도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시어 쓰임새의 특징은 그대로 그의 시정신의 순일성 또는 염결 지향성 그리고 기독교적 영성 지향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① |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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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기도」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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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
사랑하기보다/ 사랑을 간직하며,/ 허물을 묻지 않고/ 허물을 가리워주는/ 빛.// 모든 빛과 빛들이/ 반짝이다 지치면,/ 숨기어 편히 쉬게 하는 빛.// 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 아픔보다도 더 아픈,/ 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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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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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 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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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까마귀」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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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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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고독」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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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어둠 속에/ 보석들의 광채를 길이 담아 두시는/ 밤과 같은 당신은, 오오, 누구이오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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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게」 부분 |
시 ①에서는 ‘오직’, ‘가장’이라는 단정 부사의 예에서 보듯이 정신의 단호함 또는 순일 지l께 ‘뿐’, ‘밖에’, ‘만’ 등의 한정 조사가 자주 쓰임으로써 정신의 염결 지향성을 보여 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시 ②에서는 색채 사용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그가 선호하는 것은 ‘흰’이나 ‘검은’과 같은 절대 색입니다. 시 「겨울 까마귀」나 「검은 빛」에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는 중간색보다 분명하게 대비되는 절대 색이 자주 쓰이는데 이 역시 시인 특유의 결벽증 또는 염결 지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시 ③에서는 ‘영혼’, ‘새’ 등과 같이 영성 깊은 시어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심상들은 그의 시가 영성을 강하게 지니며 또 그러한 세계를 지향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라 여겨집니다.
시 ④에는 ‘칼날’, ‘보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시에서 광물적 심상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그의 견고 지향성 또는 순결 지향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보니 김현승은 가을과 고독을 운명처럼 껴안고 사랑함으로써 자유에의 길, 구원에의 길을 모색한 이 땅 근대 시사에서 개성적이고 독보적인 명상 시인, 구도 시인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이 가을엔 이처럼 삶에 관해 내성을 보여 주는 시들을 찾아 시의 여행을 떠나보시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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