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어
산책 |
 |
|
집착을 버려야 국어가 산다 |
장진한∙어문조선
대표
한 교열 기자의 경우
지금은 신문 교열계를 떠났지만, 필자의 옛 동료 중에 L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신문 교열에 매우 열성이었고, 국어 연구도 꽤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국어 사랑은 좀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그에게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아들이 울고 있는데, 달래도 그치지 않으니 와서 데려가라”라는 연락이 왔다. L은 부랴부랴 학교에 가서 아이를 데려왔다. 며칠 뒤 L은 한 동료에게 아들이 운 사연을 말했는데, 그 사연이 좀 독특했다.
아들의 담임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칠판에 기스가 났다”라고 말하자 아들은 “선생님, ‘기스’가 아니라 ‘흠집’이에요”라며 선생님의 잘못을 지적했다. ‘기스’가 우리말인 것으로 믿고 있는 담임선생님이 계속 아들의 말을 무시하자 아들은, “우리 아버지가 기스는 일본말이라고 했다”라며 울음으로 맞섰다고 한다. 훗날 L은 한 동료에게 이런 사연을 털어놓으면서 자기 아들을 매우 대견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이 동료의 전언이었다.
L의 국어 사랑은 이렇게 철저(?)했다. 아들에게까지 쓸 말과 못 쓸 말을 뚜렷이 구분할 정도이니 신문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L은 늘 기자들이 써 온 기사를 과도하게 고쳐 대 교열 대장(교열쇄)은 온통 빨간색투성이였다. 예를 들어 ‘입장(立場)’, ‘가급적’, ‘보다(부사)’처럼 일본어의 흔적이 있는 말은 무조건 ‘처지’, ‘될수록’, ‘좀더’로 고쳤다. 국어사전에 방언이라고 적힌 말도 철저히 고쳤는데, 예를 들어 ‘-길래’, ‘내음’, ‘손주’ 등은 ‘-기에’ ‘냄새’ ‘손자’ 등으로 무조건 수정했다. 필자는 “그렇게 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 방언도 쓸모가 있으니 과도한 교열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으나 L은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한 독자의 경우
이처럼 아집이 강한 사례는 독자 중에도 여럿 있다. 그 중 필자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60대 후반쯤 되는 한 아저씨다. 그는 늘 필자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교열부죠? 교열부장님이세요? 조선일보 30년 독자인데요……”라며 점잖게 말을 시작하는데, 지적한다.
그가 지적하는 사항 중에는 맞는 것도 많다. 하지만 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나 신문사 관행상 어쩔 수 없는 것도 적지 않다. 그가 최근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조사 ‘을’과 ‘에게’에 관한 문제다. 벌써 세 차례나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은 이렇다.
“○일 자 ○면에 제목이 ‘수녀님에게 받은 감동의 선물’이라고 되어 있는데, ‘수녀님에게서’ 아니에요? ‘에게’와 ‘에게서’는 다르지요.” 또 “○면에 ‘영국을 간다’는 표현이 있는데 ‘영국에 간다’가 아니에요? 어떻게 조사 ‘을’이 붙을 수 있지요?”
이에 필자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첫 번째 문제는 선생님 지적이 맞습니다. ‘에게서’로 써야죠. 그러나 신문은 제목 달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편집자가 한 글자를 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지적은 사실과 다릅니다. ‘을’은 ‘가다’ ‘오다’ 같은 동사들과 어울려 어떤 목적지로 이동하는 곳을 나타낼 때도 쓰죠. ‘에’보다 강조하는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필자의 설명을 납득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라며 자기주장만 계속하다 전화를 끊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면 다시 똑같은 문제로 “교열부죠? 교열부장님이세요? ……” 하고 전화를 걸어온다.
권오운과 이윤기의 표준어 논쟁
많은 분들이 일본말을 순화하거나, 방언이나 비속어를 표준어로 바로잡는 것을 국어 사랑의 근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말 운동을 하시는 분들의 글 중에도 그런 내용이 핵심인 것이 더러 있다.
그 중 가장 필자의 기억이 남는 것이 <알 만한 사람이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 1234>(문학수첩 간)란 책이다. KBS 출판부장 출신의 권오운 씨가 2000년 7월에 낸 이 책은 고은ㆍ이윤기ㆍ신경숙 등 유명 작가들이 작품 속에서 사용한 비속어 문제를 다뤘는데, 조선일보가 문화 면에 크게 소개함으로써 저자 권오운과 작가 이윤기가 표준어를 주제로 치열한 지상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권오운은 논쟁에서 “작가는 우리말을 갈고닦는 데 옴짝달싹할 수 없는 반면교사이므로 반드시 언어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윤기의 작품 속에 나타난 ‘저리해왔다’, ‘새비릿하다’, ‘묵근하다’, ‘속닥하다’ 등의 방언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이윤기는 “내가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저리해왔다’ 하나뿐이고, 다른 것은 인정할 수 없다”라고 반박했다. 또 “‘속닥하다(경상 방언)’를 ‘단출하다’로 적어야 한다”라는 권오운 선생의 주장에 대해 “나는 ‘속닥하다’는 말을 쓰지 않고는 문학적ㆍ정서적 풍경을 복원하지 못하겠다”라고 못 박으며, “앞으로도 어머니로부터 배운 경상도 지방어, 전라도 친구들로부터 배운 전라도 지방어, 심지어는 이북 지방어까지 계속해서 쓸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과도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돼야
필자는 이제 작가만이 아니라 일반 언중들도 일본어나 표준어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본식 한자어가 오랫동안 우리말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해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으므로 인위적으로 제거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입장(立場)’이 일본 말 ‘다치바(たちば)’에서 온 것은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우리말 속에서 살아오면서 일본어 ‘다치바’와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갖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일본식 한자어를 그렇게 취급하자는 말은 아니다. 일본 냄새가 좀 나더라도 우리에게 익숙해진 말일 경우에는 굳이 다른 말로 바꿔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잘못된 정보에 의해서 ‘일본 말 찌꺼기’로 낙인찍고 애써 몰아내려는 경우도 상당하다. ‘천정’이 그 대표격인 말로, 필자도 교열 기자 초년 시절부터 선배들로부터 ‘천정’은 ‘천장’으로 고치도록 지시받았다. ‘천정’이 일본식 한자어라는 이유다. 그렇다면 ‘천정부지(天井不知)’는 왜 ‘천장부지’라고 고치지 않는지 이상할 뿐이다.
‘천정부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천장을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물가 따위가 한없이 오르기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화 대상이 된 ‘천정’에서 온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정이 일본식 한자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최근 필자가 본 자료에 따르면 ‘천정(天井)’은 유서깊은 한어(漢語)로, 중국 사람이나 우리 조상들이 예부터 함께 써온 말이었다.
잘못된 정보에 의해서 순화대상에 오른 말은 그 밖에도 ‘이조(李朝)→조선조’[김영봉, “한글새소식”, 321호(1999년 5월호)], ‘산보(散步)→산책’, ‘소제(掃除)→청소’, ‘결혼(結婚)→혼인’, ‘남대문(南大門)→숭례문’[김영봉, “말과 글”, 50호(1992년 봄 호)] 등 여럿이 있다.
표준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내음’이 경상방언이라고 ‘내음’을 ‘냄새’로 무조건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꽃 냄새’와 ‘꽃 내음’은 분명히 뉘앙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 보면 표준어라는 것도 별거 아니다. 당연히 표준어 규정에 실려 있는 말은 충분한 연구가 되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 중에는 누가 어느 시기에 어떻게 정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흐트러진 것을 가지런히 바로잡다’는 뜻의 ‘간추리다’가 표준어가 된 내력을 알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간추리다’가 표준어가 된 내력
2003년 7월, 교열 기자들의 연구 모임인 말글사랑방(지금은 ‘미디어언어연구모임’으로 개칭)에서 일지사 김성재 사장을 모셔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서울신문 교열 기자 출신으로 만년까지 학술지 “한국학보”를 내다 2년 전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 사장은 사랑방에서 후배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는데, 그 중 재미나는 것은 ‘간추리다’가 자신의 월권에 의해 표준어가 되었다고 고백한 점이었다.
본래 ‘간추리다’는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되던 방언으로, 사전에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50년대 초 한 출판사에서 학습서 시리즈(<간추린 전과>, <간추린 수련장> 같은 것일 것이다)에 ‘간추린’이란 말을 사용해 언중에게 익숙해지자, 1958년 자신이 교열을 보던 한 사전에 슬그머니 이 말을 집어넣었다고 했다. 표준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알 수 있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요즘은 통신 기기의 발달로 지역의 문화재와도 같은 방언이 사라지고, 우리말이 획일화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도 방언을 터부시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짝퉁’이면 어때서
네티즌들이 만들어 내는 각종 신어들도 그렇다. 이런 말들을 신문이 쓰면 “어디서 나왔는지 근거도 없는 말을……” 하며 화를 내는 독자가 있다. 그래서 신문 기자들은 이런 말을 굳이 쓰고자 하면 따옴표 안에 집어넣는다. ‘틀린 말이지만 편의상 쓰겠다’라는 의미다. 하지만 본시 말이란 근거 따지고 문법 따지고 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만들어 낸 말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따라 쓰고, 그래서 세력을 얻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렇다면 ‘얼짱’, ‘짝퉁’, ‘초딩’, ‘여친’, ‘먹튀’, ‘사오정’, ‘오륙도’ 같은 말을 쓰면서 눈치를 보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규범에 지나치게 얽매이면 언어는 다양성이 사라진다. 다양성이 사라진 언어는 생명의 냄새가 나지 않고 건조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다양한 언어들로 엮어진 글은 마치 시골길을 걷는 것처럼 부드럽고 정감이 있다.
또 단어가 다양해지면 글을 쓰는 사람이 편하고, 그 글을 읽는 사람도 편하다. ‘손주’란 말을 예로 들어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손주’는 ‘손자의 잘못(경기ㆍ평안 방언)’이라고 되어 있다. ‘손자’라고만 써야 한다는 말이다. 손자(孫子)는 넓게는 ‘손자 손녀’를 뜻한다. 子(자)는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아들’이란 뜻 이전에 ‘자식’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손자를 ‘손녀(孫女)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글 쓰는 이가 ‘손자 손녀’를 아우르는 두 음절로 된 말로 표현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국어사전의 규범대로라면 그런 말은 없기 때문에 ‘할머니는 손자 손녀를 데리고 갔다’처럼 반드시 넉 자를 동원해서 표현해야 한다.
실제로 편집국 기자들 중에는 “손자ㆍ손녀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손주’라고 쓰면 안 되는가?”라고 묻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필자는 이 문제를 <연세한국어사전>을 동원해 해결했다. 국어사전 중 유일하게 <연세한국어사전>만이 그렇게도 쓸 수 있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로부터 똑같은 문의가 오자 2005년 8월 11일 자 독자 면에 이런 식으로 답변해 버렸다.
“현재 대부분의 국어사전은 ‘손자’는 ‘아들의 아들’, ‘손녀’는 ‘아들의 딸’로 적고 있다. 그러나 <연세한국어사전>은 ‘손주’를 ‘손자와 손녀’로 풀이하고 있다. 주로 1960년대 이후 한국어를 집중 분석해 만든 이 사전은 사람들이 ‘손주’를 아들과 딸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보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그 이후 기자들은 ‘손주’를 아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사용 빈도가 많은 어휘 하나를 방언이란 족쇄를 채워 못 쓰게 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말이 더욱 풍성해지려면
우리말에 다양성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간단하다. 일본식 한자어를 마치 독립운동이나 하듯이 배척하지 않고, 방언을 쓰는 것에 대해 무식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신조어를 사용하는 데 대해 경박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된다. 또 국어사전의 풀이를 ‘말씀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이론이란 바뀔 수 있다는 ‘관대한 생각’을 가지면 된다. 이제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북한어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지금부터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관대해지지 않으면 그때 심각한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