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춘·소설가, 고려대학교 교수
나의 중학교 때 국어책 속에는 유진오 선생의 『창랑정기』(滄浪亭記)가 실려 있었다. 그때 우리 국어선생님은 왜인지 이 소설을 집에 가서 읽어보라고만 하고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다. 아마도 소설은 별로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학기말고사를 보는데 생뚱맞게도 그 안에서 문제가 나왔다. “다음 낱말의 뜻을 써라”라고 몇 개 어려운 낱말들을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백줴’라는 낱말이 끼어 있었다. 물론 정답은 알 리가 없었고, 도대체 이런 낱말이 그 안에 어디 있었던가, 혼자 끙끙대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창랑정기』는 그렇게 ‘백줴’라는 낱말로 더 먼저 다가왔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창랑정’이라는 옛 대감댁을 찾아가는데, 집안 대소가가 어찌나 벌열하던지, 자기한테는 지존이시던 아버지가 일가친척들 속에 끼니까 실은 그렇지도 않더라는 그 말을 하는 가운데 ‘백줴’는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기침을 에헴에헴 하시며 나를 데리고 정경부인 누워 계신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대청에 있는 젊은이들은 더러 피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안방에는 나이 많은 분들이 가득 앉아서 아버지가 들어가셔도 피하기는커녕 ‘영감 왔소’ ‘자네 왔나’ 하면서 아버지를
백줴 아이 취급이다.
‘백줴’는 ‘백주에’가 줄어서 된 말이다. 본래 그렇게 줄여서 ‘백줴’라고만 쓰는 것인지, 아니면 그때
『창랑정기』에서만 작가 유진오가 딱 한 번 그렇게 쓰고 말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창랑정기』 외에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아직 이 말의 용처를 본 적은 없다. 그 대신 ‘백주에’는 요즈음도 흔히들 쓰고 있는 것으로 안다. 최근에는 ‘대낮에’ 혹은 ‘벌건 대낮에’라고 우리말로 풀어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백주에’라고 원래 한자말을 그냥 그대로 옮겨 쓰는 것이 더 먼저였다.
‘백주’와 ‘대낮’은 결국 같은 말이겠지만, 그래도 ‘백주에’가 그대로 ‘대낮에’와 같은 뜻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백주에’는 원래, 밝은 날에는 감히 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을 때 그 잘못을 강조하여 지적하기 위해 덧붙이는 말인데, 그래서 그것은 ‘터무니없이’ ‘까닭 없이’ ‘공연히’ ‘엉터리로’의 부사어 기능을 갖고 있다. “그 친구 벌건 대낮에 그런 거짓말을 한단 말이야.” 아마 이 정도의 부사어가 아닐까 한다.
『창랑정기』의 ‘백줴’ 또한 그 점에서 ‘아주 형편없이’라는 의미의 부사어가 될 것이다. 나한테는 지존이신 아버지를 일가친척들이 그토록 ‘형편없이’ 대하니까 몹시 놀랍더라, 하는 정도의 의미를 내포한다. 같은 말이라도 전체 문맥 안에서 파악하면 이토록 쉬운 낱말인데, 그것을 따로 떼어서 시험 문제로 대하고 보니 그토록 낯설고 까다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낱말의 뜻을 모른 채 오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내 ‘백줴’에 대한 선입견은 그런데 무척 고급스럽고도 품위 있는 말일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알고 보면 실제 의미와는 정반대였는데, 내가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을까. 그것은 어쩌면 그 낱말의 말밭인
『창랑정기』가 그만큼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창랑정기』는 어린 시절 ‘창랑정’이라는 대감댁에 가서 보고 들은 것들을 아주 호기심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적었기 때문에 그 분위기도 그만큼 품위 있고 장엄해 보였던 건 사실이다.
지난 호에는 이문구의 소설을 중심으로 토속어 또는 지방어로 쓴 소설언어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때 떠올린 생각인데, ‘그렇다면 순 서울말로 쓴 소설 언어는 어떻게 생겼을까? 토속어 또는 지방어와 달리 순 서울말로 쓴 소설 언어가 있기나 할까?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어떤 작품일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면 우선 해당 소설의 언어를 구사한 작가부터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어야 할 텐데, 누가 그런 사람일까? 내가 알기로, 월탄 박종화 선생이 아마 서울 토박이일 것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박태원도 서울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자 생각은 현민 유진오에게까지 미쳤다. 물론 ‘서울말로 쓴 소설’이라는 말이 가능하기나 할까 의아스럽지만, 그래도 ‘순 서울 토박이 작가가 쓴 소설’이란 말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창랑정기』는 화자 스스로를 ‘서울서 나서 서울서 자란’ 사람으로 적고 있다. 비록 서술자의 진술이기는 하지만, 그는 ‘가회동 꼭대기 집’에서 나서 ‘세살이 될 때까지’ 살았고, ‘여섯 살 때부터 열네 살 되던 해까지' '계동집’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이런 진술은 실제 작가 연보와 일치하기도 한다. 그리고도 유진오는 계속해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다녔고, 대학 재학시절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이 점에서 그의 소설 언어는 아무래도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란 서울 토박이의 언어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결론을 짓고 나서도, 그렇다면 유진오의 소설 언어와 다른 수많은 서울 토박이 작가들의 소설 언어는 같을까 다를까 이 점에 대해서도 물음은 더 던져야 할 것이다.
소설 언어는 크게 나누면, 이문구처럼 의도적으로 지방어를 구사한 토속어 소설 하나와 의도랄 것도 없이 작가라면 누구나 다 공통적으로 구사하는 표준말 소설 하나 이렇게 두 가지이다. 그 가운데 유진오는 커다란 범주 안에서 표준말을 구사한 작가에 해당되는데, 그것은 다만 그가 토속어를 구사하지 않았다는 말일 뿐, 결코 표준말을 구사한 대표 작가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그의 소설이 표준말 소설 언어의 대표일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1988년 고시된 표준어 사정 원칙을 보면,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이는 1933년 처음 제정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조항을 요약하면 결국 ‘현재 우리가 쓰는 서울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보면 유진오가 쓴
『창랑정기』는 그것이 발표된 1939년 당시 ‘유진오의 서울말’이니까, 그것이 곧 서울말이고 표준어라고 해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 같다. 먼저, 이와 같은 가설을 전제로 하고, 그렇다면 유진오가 구사한 소설 언어의 특징은 무엇일까?
『창랑정기』의 첫 문장을 보기로 한다.
“해만 저물면 바닷물처럼 짭조름히 향수가 저려든다”고 시인 C군은
노래하였지만 사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란
짭짤하고도 달콤하며 아름답고도
안타까우며 기쁘고도 서러우며 제 몸속에 있는
것이로되 정체를 잡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혹 우리가 무엇에
낙망하거나 실패하거나 해서 몸과 마음이 고달픈
때면 그야말로 바닷물같이 오장육부 속으로 저려 들어와 지나간 기억을 분홍의 한 빛깔로 물칠해
버리고 소년시절을 보내던 시골 집 소나무 우거진
뒷동산이며 한 글방에서 공부하고 겨울이면 같이 닭서리 해다 먹던 수남이 복동이들이
그리워서 앉도 서도 못하도록 우리의 몸을 달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가진 감정이다.
마침표나 쉼표를 찍지 않고는 도저히 숨이 가빠서 읽지 못할 정도로 긴 문장인데, 실제로는 마침표는커녕 쉼표 하나 없이 하나로 이어지는 긴 호흡을 오히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 붙인 아주 모범적인 문장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에 굵은 활자로 표시한 것처럼 이 글은 ‘~고도 ~하며’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그리고는 다시 변화를 주어 ‘~이로되 ~고’나 ‘~거나 ~면’을 반복하는데, 그리고도 힘이 부칠 때는 여기 ‘그야말로’를 사용하여 글이 새로 시작되는 기분을 강조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 문장은 여러 개의 짤막한 문장을 한 줄에 열거하되, 때로는 선택형 어미를, 때로는 반전형 어미를, 때로는 강조형 어미를 구사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여 읽는 이의 지루함을 피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어지는 짤막짤막한 문장들이 대부분 4․4조의 리듬 형식으로 분절되어서 그것을 읽는 호흡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리드미컬하다. 이런 문장 기술은 마치 한문 문장에 토(吐)를 다는 일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문 문장에 현토하듯 문장을 구사하다 보니 그 읽는 맛이 장중하거니와, 나아가 이런 문장은 1939년 당시 유진오와 같은 서울 토박이나, 그 중에서도
『창랑정기』같은 고풍스런 작품에 딱 어울렸다.
이문구의 소설이 의도적으로 토속어를 구사한다고 했을 때, 그의 소설의 현장은 당연히 시골 농촌이었다. 마찬가지로 유진오의 소설이 장중한 한문 문체를 구사한다고 했을 때 그의 소설의 현장이 서울의 사대부가 어느 특정 사회일 것은 당연하다.
창랑정이란 대원군 집정시대에 선전관으로 이조판서 벼슬까지 지내던 나의 삼종 증조부 되는 서강대신 김종호가 세상이 뜻과 같지 않아 쇄국의 꿈이 부서지고 대원군도 세도를 잃게 되자 자기도 벼슬을 내놓고 서강 -지금의 당인정 부근- 강가에 있는 옛날 어떤 대관의 별장을 사 가지고 스스로 ‘창랑정’이라 이름 붙인 후 울울한 말년을 보내던 정자 이름이다.
보다시피 창랑정은 권력이 있고, 벼슬이 있고, 정치적 욕망이 있고, 좌절이 있는, 말하자면 그곳은 시골 농민들의 삶과는 대조적이고도 이질적인 고품격의 세계처럼 보인다. 앞서 시골 농촌이 토속어의 현장이듯이 창랑정은 서울말의 현장인 것이다. 토속어의 현장이 궁벽지고 누추했던 것에 비해 서울말의 현장은 사치하고 호화롭다. 그리고는 곧 설계도를 제시하듯 사랑채는 물론 안채까지 그 내부 구조를 자랑스럽게 설명하는데, 이 또한 이색적인 서울말들이다.
좌우로 줄행랑/ 가운데 솟을대문/ 두껍닫이/
누마루/ 육간대청을 가운데 끼고 ―
퇴까지 합하면 여덟 간이나 된다 ― 서편으로
안방, 동편으로 건넌방, 안방 머리에는
마루방, 건넌방 머리에는 목방, 거기서 꺾여
뒷방, 뜰 아래로 뜰아랫방이 둘…….
떡시루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 부침개질 하는 사람,
가릿대를 들고 도끼로 내리찍는 사람,
도라지를 쪼개는 사람, 콩나물을 다듬는 사람,
고기를 재는 사람, 대갓집이라 사는
번새가 그런가 하고…….
그런가 하면 을순이는 회화나무 꽃씨로 물들인 <호야 노랑>저고리에
잇다홍치마를 입었고, 종근형의 색시는
청대 반물치마에 호야 노랑저고리를 입었고, 이밖에도 창랑정 안채에는
노랑저고리에 남치마를 질질 끄는 새댁이 득시글득시글하였다.
이상, 『창랑정기』의 언어들은 1930년대 서울에 사는 당대 지식인들의 의식주와 관련된 언어의 집합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서울말은 단지 서울 사람들만이 쓰는 고유의 억양이나 관습이 정해져 있지 않고, 특별히 토속어를 구사하는 극히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모든 작가들이 다 공통적으로 쓰는 표준어에 해당하므로, ‘이것이 곧 서울말이다’라고 표본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앞서 제시한 창랑정과 같은 어느 특정한 공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들을 모아 제시하면 그것이 바로 서울 토박이가 쓴 서울말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실, 서울 사람이 쓰는 서울말이라고 그것이 다 표준어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다 인정하는 바다. 예컨대 서울 사투리일 것이다. 소설의 경우, 그것이 표준말이냐 아니냐는 대화문에 많이 노출되는데,
『창랑정기』의 대화로는 이런 예를 들 수 있다.
‘잘 잤니/ 세수는 했니/ 집에
오구 싶지 않데/ 무얼 먹었니.’
‘잤니’ ‘했니’ ‘먹었니’는 서울말의 상징일 정도로 공인된 서울말이다. 그렇지만 ‘집에 오구 싶지 않데.’의 ‘오구’는 서울말이지만 표준어가 아니다. ‘오구’는 ‘오고’여야 한다. ‘오고’여야 옳은 줄 알면서도 서울 사람들은 그냥 ‘오구’라고 쓰고 있다.
‘우리 놀았다구
아무보구두 말 말어 응.’
이 말도 같은 맥락에서 잘못된 서울말이다. 모음조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잘못되었으면 바로잡아야 할 텐데, 그러나 최근 돌아가는 언어 추세를 보면 금방 바로잡힐 것 같지는 않다. 서울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서울 사람이 아닌 누구라도 지금은 그렇게 모음조화의 미덕을 어기고 싶어 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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