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세종 계획 사업 성과 및 과제
국어 특수 자료 구축의 성과와 전망
세종 전자사전 개발의 성과와 전망
한민족 언어 정보화의 성과와 전망
국어 정보화 사업의 미래와 전망
이곳 이 사람
어원 탐구 
우리 시의 향기
우리 소설 우리말
국어 생활 논단
국어 산책
국어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 드립니다
국립국어원 소식
국어 산책
  J에게

황정민·KBS 한국방송 아나운서 

  요즘 한창 봄기운이 만연한데 이 찬란한 봄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사람이 꽃이 예뻐 보이기 시작하면 나이 든 증거라고 하더라. 어릴 때는 그 어느 꽃보다 자기 자신이 빛나기 때문에 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젊을 때는 일이 바빠서 주변에 눈 돌릴 여유도 없으니 말이다. 지금이 한창 그럴 때겠다. 하루 종일 방송국 안에서 일하고 사람들 만나고 회의하고……. 방송이 제일 재밌고 온종일 방송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을 때지.
  이번 개편 때 네가 새로운 프로그램에 진행자로 발탁되었을 때 너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이더군. 그래. 그동안 네가 그리도 하고 싶어하던 프로그램이니. 프로그램에서 너의 모습은 어땠는지, 옷은 잘 어울렸는지, 처음이라 존재감이 작게 느껴지지는 않았는지. 나도 네가 하는 프로그램이라 눈여겨보았단다. 일단은 합격점!
  언젠가 우리가 같은 프로그램에 초대 손님으로 나간 적이 있었지. 나는 그때도 감탄을 금치 못했단다. 아나운서실에서 함께 근무를 해 왔긴 했지만, 방송 경험이 많아도 내가 한참 많을 텐데 어쩜 너는 방송하면서 그렇게 황당하고 재밌는 일들을 겪었는지. 나도 초대 손님의 입장에서 말하러 갔으면서도 네 얘기에 웃기만 하다가 돌아왔다. 참 얘기를 맛깔스럽게도 하더구나.
  내가 너를 잘 모를 때 어느 후배가 이런 얘기를 해 준 적이 있다. 그때는 J, 네가 지방 근무를 할 때였는데 너를 비롯해서 동기들한테 죽 전화를 돌려 안부를 물었는데 다른 동료들하고는 형식적인 인사치레의 안부전화였는데 너에게 전화해서 1시간 정도 통화를 했다고. 지방 근무를 하며 외롭기도 했겠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드는 게 너의 매력인가 보다.
  또 누군가는 요즘의 너를 보며 “J는 얼마나 좋을까? K도 M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그 프로그램을 하고 있으니…….” 그래 점점 우리 J가 사람들 눈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구나. 사람들에게 주목 받기 시작하면 어디에 나가도 알아보고 자기가 한 말에 대해 금방 반응이 오고 점점 신이 나면서도 어깨가 무거워지지. 그래서 나도 너에게 더 엄격하게 얘기하게 되는가 봐. 가끔은 “저렇게까지 표현하지 않아도 될 텐데…….”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
  10년 전 FM 대행진을 처음 맡게 되었을 때 내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 나도 흔히 말하는 독한 표현들을 써서 재밌게 방송하고 싶었어. 그때는 “떡볶이를 쏜다”는 표현이 처음 한 드라마에 나왔을 때였어. 타 방송사의 디제이(음반지기)가 “선물 쏩니다”라는 표현을 할 때도 나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게다가 내가 그런 표현을 쓰면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 같은데도 심의 규정에는 항상 지적이 나오고 나는 만날 불려 다니면서 야단을 맞았단다. 여러 가지 표현이 나에겐 금지되고. 왜 그렇게 그런 말들을 써야 재미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내심 이런 언어적 제약에서 자유로운 연예인들이 부러웠던 적도 있었다. 한참 동안 인터넷 누리집(홈페이지) 소개하는 게 중요했던 적도 있었는데 매일 똑같이 ‘더블유 더블유 더블유 점’이라고 얘기하는 게 지겹더라. ‘www.’을 ‘따따따 점’이라고 얘기하는 디제이(음반지기)들이 왠지 멋져 보이고. 내가 얼마나 많은 지적을 받았을지 상상이 가지?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 않니? 한두 가지 지적을 당하다 보면 선별적으로 말이 나오기 보다는 자기 방어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 조심하게 되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박탈당하게 된다. 난 답답했어. 어떻게 이런 말 저런 말 다 조심하면서 자유롭게 방송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디제이(음반지기)들과 다른 잣대로 나를 재어 가면서 나에게도 똑같은 경쟁력을 요구하다니.
  확실히 가수나 다른 개그맨들이 하는 말실수나 틀린 말들에 대해서는 다들 관대하지만 아나운서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그건 아마 우리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겠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단련도 되고 꼭 그런 방식은 아니더라도 “내가 잘 할 수 있겠구나.”하는 자신감도 생기더라. 하지만 후배들에게는 항상 조심스럽다. 방송에 대한 한마디를 바라는 선배의 조언에 목말라하는 후배들에게 함부로 얘기했다가는 그만의 고유한 싹을 잘라 버릴 수도 있으니. 나는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선배들의 한마디에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 누구의 방송은 100점 만점이고, 나머지는 가치 없고……. 방송은 그런 게 아니잖니? 그래서 뭐라 얘기하기가 어렵다.
  요즘 네가 하는 방송이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면서 지적도 많이 눈에 띈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조심하면 되는 것이고 큰일은 아니지만 난 기본적인 태도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냥 몇 가지만 살펴보자. 우리가 얼마나 자주 알게 모르게 방송에 부적절한 말들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언젠가 방송에서 네게 “다른 선배들이 지적하면 어때요?”라고 물어 보니, 너는 “누가 저를 좀 까줘야 희열을 느껴요. 난 좀 씹혀야 되는데 누가 칭찬이라도 하면 어색해.”라고 대답했지. 소심한 나의 모습과는 다른, 대범한 너의 모습을 보면서도 네가 방송에서 ‘까다’ 혹은 ‘씹다’라는 말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게 뜨끔하더군. 
  그리고 요즘 ‘식스 팩’이라는 말 많이들 쓰잖니? 다른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하도 그 말을 많이 해서 이제 대부분 멋진 복근이라고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도 아나운서 입에서 ‘식스팩’이라는 말이 나오면 당황스럽다. 아마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바른말 사용에 앞장서야 하는 아나운서로서 방송에 부적절한 단어 사용이 많음. 좀 더 재미있게 진행하려는 노력은 엿보이나 비속어나 은어는 자제하고 좀 더 순화된 표현을 사용했으면 함.” 이 정도의 평가가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평가들이 누적되면 재미있게 진행하려는 네 노력보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으로 너를 보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내가 조심스럽게 너에게 이야기했을 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줘서 고마워. 실제로도 많이 신경 쓰는 것 같아서 한결 방송 듣기 편해지더라. 물론 네가 더 많은 표현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단다. 하지만 바른 우리말의 그릇 안에서도 넌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게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너의 앞길에 많은 기회와 행운이 함께 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