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언어 구사


유종호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전설적인 인물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따라 다니게 마련이다. 세상의 호사가(好事家)들이 끊임없이 새 얘기를 보태 주기 때문이다. 시선(詩仙)이란 칭호를 들어온 이백에 대해서는 술이 취해 달을 잡으려고 강으로 뛰어들다가 세상을 떴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문화 대혁명 이후에 간행되었다는 郭沫若의 <이백과 두보>에는 이백의 출생지가 멀리 중앙 아시아의 카르기스 공화국이라는 해석이 보인다. 그렇다면 그 옛날 천산 산맥을 넘어 중국으로 넘어 왔다는 얘기가 된다. 술을 한 말 마시고 시 백 수를 적었다는 것 또한 이백에 따라다니는 전설적 일화이다.
    영감을 뜻하는 서구어는 본시 '불어넣다'의 뜻이다. 따라서 시인 바깥에 있으면서 불어넣는 어떤 존재를 전제하는 것인데 이백의 경우는 술이 그 매개가 되어 있는 셈이다. 영감을 받고 작품을 하룻밤 사이에 썼다는 투의 얘기는 낭만주의자들 사이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시작 과정은 피 말리는 비평적 노동의 과정이라는 것이 사실에 맞는 것이라고 믿어야 할 증거가 많다. 시작과정이 한결 엄격해지고 있는 현대 시인의 경우만이 아니고 낭만주의 시인들의 초고같은 것을 보면 겉보기와 달리 많은 퇴고 과정을 거쳐 텍스트가 탄생하였음을 알게 된다.
    우리 쪽 근대 시인의 경우 김소월은 시작 과정을 비평적 노동이라고 간주하고 각고 끝에 시 한편을 완성했다기보다는 젊은 날의 넘쳐나는 감흥에 의탁해서 시를 써 내려갔다고 흔히 추정된다. 그의 시편이 20대 전반의 극히 젊은 날에 지어졌고 아직 우리 근대시가 초창기였기 때문에 작품적 완벽성이라는 개념이 비교적 생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엘리엇이 말하는 "청각적 상상력"이 풍부하면서 섬세한 시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매우 음률적이다. 소월의 시 형태는 다분히 번역시를 모형으로 해서 4행 1연, 3행 1연, 2행 1연으로 된 것이 많으며 그 혼성형도 보여 준다. 그러나 음수율 혹은 음보에서는 구비 전통에 대한 청각적 충실을 보여 준다. 우리 민요나 시에서 3, 4, 5의 기본 음수를 일정한 정형없이 적의 배열하면 음률성이 확보되는데 김소월 시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시가 독자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주제와 함께 그 음률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새국어생활 제12권 제3호(2002년 가을)
    그러나 김소월도 그 나름의 퇴고 과정을 거쳐서 그의 명편을 마련하였다. 비록 그 과정이 비교적 단순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즉흥적으로 명편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시집의 표제가 되어 있고 또 당시에 성행하던 "조선주의"의 구체적인 표상이 되어 있어 대표작으로 꼽히는 "진달래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영번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그러나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의 원형은 사뭇 다르다. <개벽> 1922년 7월호에 실린 첫 발표 때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고히고히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그 진달래꽃을
한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길 발걸음마다
뿌려 놓은 그 꽃을
고히나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3행 1연이 개작에서 늘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주 대폭적인 수정이라 할 수 있다. <고히고히>는 개작보다 단조하다. 2연에서 <그 진달래꽃을> <한아름>은 너무 특정적이다. 또 <가시는 발걸음마다 뿌려 놓은 그 꽃>은 너무 설명적이어서 리듬도 순탄하지 못하고 또 <뿌림>이 두 번 나와서 단조한 반복이 되어 있다. <고히나 즈려밟고>도 반복이 있는 셈이다. 따라서 현행 형태로의 개작이 어떠한 면에서도 뛰어난 개신이라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 3행 1연을 보충함으로써 기승전결이 뚜렷해지고 또 반복을 통한 강조가 화자의 절실한 심정을 효과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 만약 첫 발표 때의 형태가 그대로 시집에 수록되었다면 과연 소월의 대표작으로 지목되었을는지 의문이다. 김소월이 공들여 퇴고 수정함으로써 명편 "진달래꽃"이 탄생한 것이다. 동시풍의 절창인 "엄마야 누나야"를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그런데 <개벽> 1922년 1월호에 발표된 원형에는 <엄마야 누나야 강변에 살자>로 되어 있다. 어법상으로 한결 정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 느슨하게 여겨진다. 개작에서는 조사 <에>가 빠짐으로서 느슨한 이완감이 가쁜 리듬감으로 개선되어 있다. 사소한 차이 같지만 말 한마디에 목숨이 걸려 있는 시에서는 커다란 차이다. 여기서도 김소월이 특히 음률성과 리듬에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본다. 다음엔 "먼 후일"의 경우를 살펴보자. 시집에 수록된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잊고
먼 훗날 그 때엔 "잊었노라"

<개벽>지 1922년 8월호에 난 첫 발표작은 한결 장황하다, 그것을 전문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먼 훗날에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맘으로 당신 나무라 하시면
그때에 내말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당신이 그래도 나무라 하시면
그때에 이말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못잊는 당신을
먼 훗날 그 때에는 "잊었노라"

양자를 잘 비교해서 읽으면 개작이 될수록 간결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현행 개작 시편에서는 "그때에 내말이"라는 보조 어구가 2연과 3연에서 생략되어 있다. 생략되었다 해서 의미에 혼선이 생겨나거나 어려워지지 않고 있다. 장황한 서술을 배제한 경제적 처리는 비단 소월의 이 작품뿐 아니라 대체로 시에서는 효과적이다. 백 마디 할 것을 열 마디로 하고, 열 마디 할 것을 한 마디로 하고, 한 마디 할 것을 아예 입을 봉해 버리는 것이 시의 길이란 뜻의 말을 누군가가 하였다. 옳은 소리이며 시뿐 아니라 산문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진달래꽃>에 수록된 많은 시편들이 이렇게 경제적 처리를 통해서 더욱 읽을 만한 시편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영감에 몸을 맡기고 일거에 작품을 완성했다는 투의 생각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김소월이 쓴 정주 방언의 이모저모에 대해서는 이기문 교수의 <소월시의 언어에 대하여>에서 자세히 거론되어 있다. 가령 "산새는 왜우노, 시메산골"의 <시메>가 <드메>와 함께 정주 지방에서 쓰이고 있다는 것이어서 소월시의 독자들이 꼭 참조해야 할 이차 문서이다. 그렇지만 가장 눈여겨 볼 만한 것은 그이 창의적인 언어 구사와 관련하여 거론된 부분이다.

이제금 저 달이 서름인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시집와서 삼년
오는 봄은
거친벌 난벌에 왔습니다.
---"무심"

<이제금>은 <다시금>에 기대어 소월이 만들어 쓴 말로 알려져 있다. 또 <난벌>은 <난바다>에 기대어 만들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경우 모두 적절할 뿐만 아니라 리듬상으로 볼 때 매우 효과적이다. 시를 읽을 때 뜻 위주로 접근하면 불가해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음률상의 고려로 일탈적인 어사가 나오는 경우가 아닌가 생각해 보면 의외로 쉽사리 풀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제금'이란 발명적 어사가 단순히 리듬만을 위해서 채용된 것은 아닐 것이다. 시어의 특색은 일상 언어로부터 일탈하는 것이다. 시에서는 낯선 말이나 낯선 표현이 시적 효과에 기여한다. <이제금>은 생소감 때문에 그 자체가 매력이 되어 있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이란 대목에서도 <시메산골>이 생소한 방언이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게 된다.

강위에 다리는 놓였던 것을!
건너가지 않고서 저볏는 동안
"때"의 거친 물결은 볼새도 없이
다리를 무너치고 흘렀습니다.

먼저 건넌 당신이 어서 오라고
그만큼 부르실 때 왜 못갔던가!
당신과 나는 그만 이 편 저 편서
때때로 울며 바랄 뿐입니다려.

<진달래꽃> 상장 이후에 발표한 "기회"의 전문이다. 전후 맥락으로 보아서 <저볏는>는 <망설이는>의 뜻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반 사전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역시 평북 방언이라 생각된다. <바랄뿐입니다려>는 "가는 길"에 나오는 "흘러도 연다라 흐릅디다려"와 마찬가지로 정주 방언이라 한다. <흐릅디다려>는 리듬상으로 보아 천편일률적으로 끝나는 <흐릅니다>보다 한결 매력적이다.
    근래 표준어가 보급됨에 따라 방언을 일종의 죄인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암암리에 생겨나고 있다. 근대 국가가 순전히 편의주의에 따라 설정한 표준말은 양민이고 방언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선적인 소박한 착각이다. 우리는 시 읽기를 통해 생활 속에 뿌리박고 있는 방언의 힘을 체험한다. 소월과 백석의 서도 방언이나 박목월의 영남 방언은 그들의 시를 실감나게 하는 매력의 원천이 되어 있다. 잊혀져 가는 풀뿌리 말인 방언이 시 속에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