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권 / 부산대 명예교수
지난 늦가을 국립국어연구원으로부터 『나의 책·나의 학문』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는 새삼 내가 펴낸 책들과 학문의 업적을 돌이켜 보니 별로 내세울 게 없어 거절할까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이 흩어져 있던 나의 연구물들과 지난 발자취를 모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진정 고맙게 여기고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대학에서는 의미론과 문법론, 중세 국어 강독을 주로 강의해 왔지만, 내가 깊이 관심을 둔 분야라고 한다면 언어학의 응용 분야인 '국어학설사'의 연구이다.
1948년 문리학부(부산대) 때로부터 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분야를 연구해 왔지만, 그저 국어학설사에 해당하는 논저와 국어학개론 관련 공저가 2권 있을 뿐이라 기나긴 세월이 오히려 가볍고 아쉽다.
그러나 나는 삶을 온통 교육에 바칠 수 있었던 지난 세월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배움에서나 가르침에서나 그리고 사람 사귐에 있어서나 언제든 순수한 정으로 사람들을 만나 큰 어려움 없이 따뜻하게 지내 왔으므로, 학계와 교육계 그리고 나의 일상사에 있어서까지 어느 하나도 그저 묻어두고 싶지 않은 보람있는 나날이었다고 스스로 뿌듯해 하고 있다.
국립대로 설립된 부산대학 태동기와 전시 연합 대학(1950∼1951) 덕으로 훌륭하신 선생들께 사사한 학창 시절! 뒤돌아 보면 잠깐 흘러간 세월이지만, 보람있게 보낸 교수로서의 나의 삶을 빛바랜 사진 속에서 들추어보고 그 속에 다시 머무르고 싶어하듯, 나의 스승과의 소중한 만남과, 그곳에서 이룬 나의 학문 '국어학설사' 연구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1
나는 1948년에 부산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학부에 진학(48학번)하였다. 대학 4년 동안 주로 대신동 교사에서 세 분 스승―요산 김정한(현대문학), 백영 정병욱(고전문학)과 눈뫼 허웅(국어학, 지도교수) 밑에서 공부하였다.
예과 시절 야간학부에서 수학하였기에 1948년 7월 어느 날 본과 정규 1년생이 되기 위해서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세 문제를 치른 1시간 동안 감독을 맡으신 백영 선생은 한번도 자리를 뜨시지 않았다. 그때 공과 사가 분명하신 백영 스승의 학자적 풍모를 알게 되었다.
세 분 선생님 외에도 전시 연합대학(1950년 말부터 1951년)에서 이숭녕 선생의 국어학 특강(해동고교), 대신동 교사에서 방종현 선생의 방언학을 수강하였으며, 군복 차림의 이희승 선생께서 강의하셨던 국어학을 수강하였으니, 나의 학창 생활은 참으로 풍요로웠다. 더구나 1949년(?) 무렵, 허웅 선생님과 한 지붕 밑―부산시 동대신동 2가 411번지―에서 사시던 백영 선생님을 토요일이면 자택으로 가서 뵙기도 하였는데, 학문도 학문이려니와 삶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다. '가슴으로 읽는 글과 눈으로 그저 볼 글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은 지금도 새롭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 시절까지 농구 선수로 건강하고 활기찬 나날을 보냈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방대한 학문을 접하고 여러 스승을 모시게 되어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젊은 시절을 보냈으니, 배우고 때로 익히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의 즐거움을 누린 것이다.
나는 한때 경남상업고등학교 임시교사로 있었는데 1950년 6·25 이후 시내 학교에 국군이 주둔하여 학교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나는 해군 연락관(UN군의 문관 소위)으로서 1950년 12월 27일에 함정(수송선)을 타고 인천 앞 덕적도에서 몇 달을 일하기도 했으며, 인천시청 앞 광장에서 중국인 포로 몇 사람의 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1952년 봄, 대신동 교사 백강당에서 학부졸업장을 받았다. 1953년 2학기부터 부산대학교 시간강사로, 1955년에 부산대학교 법과대학 소속으로―티오[정원] 관계로― 근무하다가, 1957년 12월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로 옮기게 되었다. 1990년 봄에 정년퇴임하기까지 교수 생활 35년 동안,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거치고, 1974년 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서 아래와 같이 여러 겸보직을 맡아 대학 일을 하였다.
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문에 있어서는 외도라 하겠으나, 대학교육 현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여러 보직을 맡으면서 나는 그 무엇보다 인화(人和)를 앞세워 사람 관계를 중시하였다. 그 덕에 좋은 이들과 벗트고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지금도 부산 외솔회장 일과 부산대학교 이문회의 자문 위원 일을 맡으면서,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는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학문의 성취와 보직뿐만 아니라 삶의 잘못을 모두 내 분복과 내 탓으로 돌리며 다만 정성을 다해 올곧은 교육자의 길을 걷기에 애써 왔을 따름이다. 그 때도 그러했지만, 삭막한 지식의 나눔이 아니라 마음을 서로 나누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스레 느끼고 있다. 그래서 희수(喜壽)에 접어든 노년이 허허롭지 않다.
내가 어린 시절에 그리던 꿈인 교육자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교수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여 왔음을 스스로 기쁘게 생각한다. 삶이든 학문이든 욕심낼 것도 없고, 서로 다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오직 선의의 경쟁을 하고 그저 수분하며 할 만큼 할 뿐이다. 내 하다가 다하지 못한 일은 또 다른 후배가 할 것이니 이는 더욱 기꺼운 일일 것이라 하겠다.
2
나의 학문을 돌아보니, 저술한 책 두어 권과 『표현 문법』에 대한 공저 두 권, 국어학 개론서 두 권과 산문집 한 권이 고작이다.
학위논문인 『최세진 연구』-그의 언어학적 업적을 중심으로-(1974년 2월)는, 1962년부터 자료 수집을 시작하여 10여 년의 긴 세월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최세진(1465∼1542)의 언어학적 업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려고 했을 뿐, 이것을 학위논문으로 만들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73년 박사 학위 논문을 심사 받는 과정에서 심사 위원 선배 교수들이 내용의 일부를 빼라고 하였지만 애써 공부한 것이 아까워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주심을 맡으신 허웅 스승께서 동숭동 서울대학 연구실에서 그 부분을 뺄 것을 간곡히 권하셨기에 결국은 그 뜻을 받아들였으니, 논문이 다듬어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뺀 부분을 뒷날 새로 손질하여 여러 편의 논문을 만들 수 있었기에 나름으로 국어학사의 연구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지난 1999년 정부에서 10월의 문화 인물로 '최세진'을 선정하였기에, 한글학회의 요청으로 10월 28일 서울 한글학회에서 최세진 선생의 생애와 학문, 그리고 언어학적 업적―한자음 연구, 이문 연구, 국어 연구, 성운학 연구―에 대해서 발표했고, 그 내용을 『한힌샘 주시경 연구』 제12호(그해 12월에 나옴)에 실었다.
내 학위 논문인 최세진 연구가 내 학문의 정수리에 위치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오로지 허웅 스승의 강의와 지도가 나의 평생 연구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1976년 12월에 펴낸 『국어학사 논고』는 최세진의 언어학적 업적을 중심으로 한 학위 논문과, 이후의 조선시대 학자 세 사람의 연구 논문으로 이루어졌다. 그 때도 허웅 스승께서 '완전무결한 책을 만들려면 죽을 때까지 해도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시며 독촉 아닌 지시를 하셨기에 마음을 정하고 책을 펴냈던 것이다.
나는 최세진의 언어학적 업적을 그의 지식의 결과물만을 다루지 않았다. 한 학자의 학문적 업적은 그의 생애를 바탕으로 하여 자라난 나무요 피어난 꽃이라고 보고 최세진의 생애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고, 이로써 그의 학문 활동의 성격을 밝힐 수 있는 면도 적지 않았다. 국어학이, 언어학이 유물적인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면 몰라도 적어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정신적 산물인 인문을 대상으로 하는 학이라고 한다면, 그 주체인 인간의 생애와 관련지어 밝히는 일은 의의있는 일이라고 생각함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바뀜이 없다. 삶을 떠난 학문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래서 나는 『국어학사 논고』 책머리에 "국어학사 기술에 있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은 학자와 학설과 그것이 실려 있는 문헌이다. 이 책에서 학자의 학설은 말할 것도 없고 연구 태도나 그 배경까지도 규명하여 학문적 맥락을 잡아보고자 하였다. 이런 체재로 시도된 국어학사 논고는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이러한 나의 단견을 허웅 스승께서도 헤아려 주시어 다음과 같은 서문을 얹어 주셨다.
국어학에 있어서도, 지금 국어학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더듬어서, 현재는 과거의 축적임을 분명히 인식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문화사의 모든 면이 그렇듯이, 국어학에 있어서도 식민지 시대로 인한 역사적 단절 때문에 과거는 현재로 잘 이어지지 않고 있어, 현재의 연구가들은 과거를 잘 돌볼 줄을 모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산대학의 박 태권 교수는 국어학사의 연구에 몸을 바친 우리 국어 학계의 귀한 존재이다. 필자는 일찍 부산대학 재직 중 국어학사를 강의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부터 박 교수는 이 방면에 남 다른 흥미를 느끼는 것 같더니, 그로부터 이미 사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그 때의 그 뜻을 꿋꿋이 지녀, 오늘에 있어서는 국어학사의 연구가로서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필자의 기쁨은 붓으로 그려내기 어려운 정도이다.
이제 앞으로 되어 나올 책의 교정지를 보니, 최 세진의 연구가 중심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박 교수의 연구 태도는 매우 주목되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 즉 한 학자의 학문 세계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학설만을 탐구의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그 학자의 생활의 여건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우리가 경청해야 할 말이다. 학문이 인간과 유리될 수 없는 한, 이러한 연구 태도는 지극히 타당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젊은 학자들도 다루기 어려워하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국어학설사 연구를 나의 학문의 주종으로 삼게 된 것은, 아마도 이 서문의 한 말씀으로 주신 스승님의 너그러운 채찍 덕분이 아니었을까 자문해 본다.
『국어학사 논고』의 서평을 쓰신 고 박병채 선생(고려대 교수)도, "이제까지의 기술 태도는 문헌이나 학설에만 치중하여 서술되었던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저술에서는 종래의 이와 같은 일반적 기술 태도를 지양하고 있는 점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업적과 어학사적 위치를 구명하는 데 있어 종래의 일반적 경향인 문헌이나 학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학자 자신의 생애와 연보를 추적하여 그들의 생활 환경을 중심으로 인간상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들의 학문적 맥락을 체계화하려 한, ....네 편의 논문집이다. 저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확실히 새로운 시도임에 틀림없다. 학문을 학자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한, 학설뿐만 아니라 그 학자의 생활 환경과 사람됨까지도 면밀히 추적하려는 연구태도는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평가해 주었다.
산문집 『나무 거울』(1981. 5)은 고 향파(向坡) 이주홍 선생의 격려 말씀과 도움으로 대구에서 출간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전재호 교수와 나의 우정을 담은 '와 카노'라는 글이 실려 있다. 뿐만 아니라 2001년 11월 3일에는 부산
외국어대학에서 외솔 선생의 소리갈(전재호)과 씨갈(박태권)이라는 주제로 나란히 초청 특별 강연을 맡게 되었으니 두 사람의 인연이 남다르다 싶어 더욱 소중하다.
저술 활동의 첫 작품인 『국어학개론』(1966, 형설출판사, 대구) 또한 전재호 박사의 연락을 받고 이루어진 것인데, 박태권 외 5인(강복수, 강성일, 박은용, 유창균, 전재호 님) 공저로, 내가 쓴 분야는 의미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이었다. 또 전재호 교수와 공저한 『표현을 위한 국어문법』에서 나는 문장론을 썼다. 이 책은 신선하고 새로운 보기말들이 많이 올라 있어 살아있는 규범문법 책이 되었다. 이처럼 개론서와 표현문법을 공저한 것은 전적으로 전재호 교수의 뜻에 따른 일이므로 그 인연이 참으로 깊다고 하겠다.
1982년에 출간한 『국어학개론』은 성광수(고려대 교수), 도수희(충남대 교수), 이돈주(전남대 교수) 등 일곱 사람이 집필한 책인데, 내가 총론 부문을 맡았다. 지금 보아도 언어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으로 본다.
3
돌이켜 보면, 내 학문의 시작은 1948년 부산대학교 문리학부 본과생이 되면서부터이다. 앞에서 말한 바 허웅 스승을 비롯하여 정병욱 스승과 요산 김정한 스승께서 가르쳐 주시고 1955년 대학 교수 생활을 하도록 해 주신 것이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학자로서 연구하고 인간으로서 살아 온 한 생의 기반이 되었다.
50여 년 세월을 더듬어 보니 나는, 1973년 가을 학기에 '최세진의 언어학적 업적 연구'라는 학위 논문 심사를 받게 되었고, 이듬해인 1974년 봄에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이 논문을 쓰기 위하여 12년간 계속해서 자료를 모아 왔고, 1976년엔 샘문화사를 통해서 『국어학사 논고』라는 책을 펴냈다.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최세진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고 또 주시경 선생의 학설도 연구하였다.
2002년 봄, 일흔 일곱의 나이에 『국어학사 논고』의 내용을 수정·증보하여 『국어학사 연구』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내기 위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
이 책에서는 국어학설사에 대하여 3부로 나누어 열기로 하였다. 특히 제3부에는 현대 국어학의 출발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주시경 선생의 국어학의 학설에 대한 나의 논문 네 편을 새로 보태어 실었다.
내가 국어학설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제 되돌아보니 아무래도 중학교 시절 3년 동안(부산상고 일제 치하) 중국어를 배운 것에 뿌리가 있는 듯하다. 이를 계기로 광복 후 4년간 내 나름으로 골똘하게 중국어를 계속 공부하였던 것이다. 우리 삶의 긴 여정도 그 앞뒤가 이렇듯 서로 엮여 있으니 어느 한 때 부질없이 지낼 수가 없다.
또 우리말 연구에 있어 국어학사를 공부하게 된 것은 1945년 8월 15일 나라의 광복 덕분에 나의 고향 통영국민학교(모교)에서 10월 1일부로 임시 교사가 되어(고등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사'를 가르친 것이 계기였다. 그 후 부산 경남상고에서 국어과목을 담당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부산대학교 예과와 본과 4년(국어국문학과)을 수학하여 학부를 졸업하게 되었다. 학부 시절 최세진에 대한 국어학사 강의를 허웅 스승으로부터 받으면서 마음 속으로 뒷날 최세진의 학문을 좀 더 깊이 연구해 보고자 한 것이 오늘날까지 국어학설사를 연구해 오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내 학위 논문(1974)인 최세진 선생의 언어학적 업적에 대한 연구와 또 현대 국어학의 출발점인 주시경 선생에 관한 연구를 하여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주시경 선생과 국문연구소(1976)', '주시경 지은 『대한국어문법』의 어학사적 위치(1978)', '주시경 지은 『국어문전음학』의 어학사적 위치(1979)', '주시경의 짬듬갈에 대하여(1986)'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국어학사 연구』의 제3부로 삼았다.
특히 저서는 아니지만 1959년 6월에 『국어 모음조화 변천 일고』(국어국문학지 제 1집)는 학부 졸업 논문으로 나로서는 생후 처음으로 귀납적 방법과 통계 수치로 쓴 학술 논문이다. 나는 이 논문에서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공시태의 수치를 1기∼4기로 구분하였다.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첫 논문인 <국어국문학>(1959.6)에 실린 이 논문은 나로선 학부 졸업논문이므로 참으로 뜻 깊어 여기에 되새겨 둔다.
젊은 시절엔 드높기만 한 꿈을 꾸고 살았다. 그러나 학문 연구를 거듭할수록, 지금 이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은 꿈은 모두 허황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자하(子夏) 이르되, 박학이독지(博學而篤志)하며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하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논어, 19장 자장편)는 말씀을, 학문하는 심덕을 함양하는 방법으로 삼고 실천해 왔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한다. 깊고도 먼 길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새로운 방법과 체계와 신선한 학설을 내 놓는 끊임없는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나로서는 대학의 연구 생활에 전념하지 못하고 겸보직을 여러 가지 맡았으며, 많은 시간과 힘을 낭비하였다.
젊은 후배 교수들은 시간을 아끼고 각자의 연구 대상과 연구 방법을 신중히 검토하여, 신선하고도 새로운 학문 체계를 정립하여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