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유학과 설총의 학문

김항수 / 동덕여자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Ⅰ. 머리말
    유학은 삼국시대에 수입된 이래 오랫동안 역사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삼국이 고대 국가로 성장할 때에는 불교와 함께 유교적인 정치 제도가 수용되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유교적인 이념과 정치제도는 전제왕권의 강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유교적인 이념과 제도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성리학 이념으로 유교적인 사회 체제와 생활 방식이 보편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유학은 역사 발전에 따라 일정한 사상적 기능을 담당하며 전개되어 왔다.
    그런데 우리의 사상사는 외래의 사상을 토착 사상으로 만드는 노력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신라시대에 불교를 '신라화'하여 독자적 불교 전통을 가꾸었듯이, 삼국 이래로 유학을 이해하여 우리 사상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계속되었고, 그러한 노력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조선화'하여 조선 성리학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삼국 이래로 유학 사상을 어떻게 '우리화'하여 한국 사상으로 만들었는가를 밝히는 점은 매우 중요한 사상사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유학은 한당유학과 성리학으로 대별할 수 있다. 삼국 이래로 고려시대까지는 한당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시대였다. 그래서 신라와 고려에는 한당유학의 경전인 오경의 이해와 해석이 중요한 과제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경서인 사서 삼경의 해석이 중요시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차이는 말과 글을 비롯한 전반적인 생활방식과 사유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경서를 해석하여 성리학을 조선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학자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였다면, 신라와 고려시대에 한당유학의 경전을 해득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학자는 설총이었다. 설총은 한문을 풀이하는 방법을 창안해 내어 최초로 유학의 경전을 풀이하였으며, 그의 경전풀이는 고려시대까지 통용되었다. 그래서 설총은 고려시대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오늘날에도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설총을 알고 있다.
    본고에서는 유학사상사적인 측면에서 설총의 학문과 업적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국어학에서는 이두와 관련하여 설총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있으나, 유학사상의 측면에서는, 설총의 사상을 알려 주는 자료가 워낙 없기 때문에, 모든 유학사상사 책에서 설총을 거론하면서도 개설적인 언급에 그치고 있다. 본고에서도 자료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지만, 유학 사상의 전반적인 흐름과 관련하여 설총에 관한 기존의 자료를 검토함으로써 설총 학문의 성격과 사상사적 위치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Ⅱ. 신라 유학과 설총
    1. 신라의 유학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고대국가로 성장하고 전제 왕권을 확립함에 따라 불교와 함께 유교적인 정치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였다. 불교는 고대국가에 걸맞는 통일적인 세계관을 제공해 주었고, 유학은 국가의 운영 원리와 정치제도를 제공하여 왕권의 전제성을 뒷받침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삼국은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불교를 공인하고 유교적인 학교 제도와 율령 체제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늦은 신라도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여 가장 불교적인 성격이 강한 국가를 이루었으나, 통일을 전후한 무렵에 오면 유교적인 정치 이념과 제도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신라가 팽창하여 넓은 영토와 많은 주민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불교적 세계관과 전통적인 통치 방식보다는 더욱 세련된 통치 방식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가 통일해 가는 과정에서 유교적인 정치 이념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진흥왕순수비문에는 『서경』에 나오는 제왕의 덕(德) 관념과 함께 "자기를 수양하지 않으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다"(莫不修己 以安百姓)는 유교적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치 이념이 표방되고 있다. 또한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에는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등의 유교 덕목이 강조되고,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보듯이 화랑의 기록 등에도 유교 경전의 이름이나 구절이 인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신라가 단순히 불교적 이념에 의해 지배를 합리화하던 단계에서 군주의 덕(德)과 인(仁), 신하의 충(忠) 등 유교 이념을 요구하는 단계로 진전되었고, 신라의 전통적인 윤리 관념도 유교의 개념으로 재정리되면서 새로운 유교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기에 오면 유교 이념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 유교는 불교와 함께 통일신라의 전제왕권을 뒷받침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중요한 이념적 토대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전에는 불교식으로 붙이던 왕의 이름도 유교식으로 붙이게 되었으니, 무열왕부터는 태종이란 유교적인 묘호(廟號)를 사용하여 이른바 유교식 왕명시대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에서 유교 이념이 강화됨에 따라 유학도 한 단계 발전하였다. 통일 이전의 유학은 정치적인 이념과 제도, 문자의 기록과 문장, 일상 생활의 윤리 규범 정도에 그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통일 이후 진골 출신의 국왕이 유교 이념을 강화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함에 따라 유학의 기풍도 한층 높아갔던 것이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거한 후 도당유학생을 파견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한 것도 유학의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통일 이후 신문왕, 성덕왕, 경덕왕, 원성왕 대에는 유학이 매우 발달하여 학술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이 무렵에는 유학을 가르치는 국학(國學)의 제도가 정비되고, 관리의 등용도 유교 경전으로 선발하는 제도로 바뀌어 갔다.
    신라는 통일 이전인 진덕여왕 5년(651)에 이미 박사(博士), 조교(助敎), 대사(大舍)란 벼슬을 두어 유학 내지는 한학을 가르치도록 했는데, 통일 후인 신문왕 2년(682)에는 국학으로 승격시켜 예부(禮部)의 관할에 두고 경(卿) 한 사람을 두어 총재케 하였다. 국학에서는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예기』(禮記)와 『주역』(周易), 『좌전』(左傳)과 『모시』(毛詩), 『상서』(尙書)와 『문선』(文選) 등 3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국학의 유학 교육은 공자 이래의 효제충신(孝悌忠信)이 담긴 『논어』와 『효경』을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한 대(漢代) 이래로 중시된 오경의 경학과 『문선』의 문장학을 전공과목으로 나누어 가르치는 것이었다.
    또한 성덕왕 16년(717)에는 공자와 10철(哲), 72제자의 화상을 국학에 모시게 하였다.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정해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을 정했다. 국학의 학생 중에서 『춘추좌씨전』이나 『예기』, 『문선』을 읽어서 뜻을 통하고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를 상품(上品)으로 하고, 『곡례』(曲禮),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품(中品)으로 하고, 『곡례』, 『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하며, 오경, 삼사, 제자백가서에 능통한 자는 삼품과에 구애되지 않고 발탁하여 등용한다는 것이다. 독서삼품과는 유교의 기본 윤리, 오경의 경학, 문장학, 사자서(史子書)를 관리 채용의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화랑의 천거나 활 쏘는 기술 등으로 인재를 등용했으나 이제는 유학의 습득 정도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에서 유학적 기풍이 한창 고조되는 시기에 강수(强首), 설총(薛聰)과 같은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강수와 설총은 우리나라에서 학술적으로 유학을 전공한 첫 번째 학자에 해당한다. 강수는 출세간의 종교인 불교대신에 유교를 공부할 것을 택하여 『효경』, 『곡례』, 『이아(爾雅)』, 『문선』을 배웠다고 한 데에서 유학을 선택한 유학자였음이 분명하고,(15)  설총도 처음에는 불교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여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였다. 이전에도 유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이 있었지만, 유교를 선택하여 상당한 학술적 경지에 이른 학자는 이들이 처음이다. 강수와 설총은 신라의 유학적 기풍이 한창 높아지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지만, 강수가 통일해 가는 과정에서 당나라 및 고구려, 백제와의 외교에 필요한 대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던 데 비해, 설총은 통일후 유학이 학술적으로 정착해가는 시기에 유학의 경전을 해석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강수와 설총은 "통일신라 초기의 거유(巨儒)"로서, 신라 불교계의 최고봉이었던 원효 의상에 비견할 수 있는 유교와 문학계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것이다.(16)
    2. 설총 학문의 성격
    설총의 자는 총지(聰智)로서, 증조는 잉피공(仍皮公), 조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며 원효(元曉)대사와 요석(瑤石)공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설총은 생몰 연대도 정확하지 않아 대략 태종 무열왕대인 654년부터 660년사이에 태어나서 740년 무렵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설총은, 『삼국사기』에 "태어나면서 도를 깨우쳤다.(生知道術)"라고 하였듯이,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일찍이 승려가 되어 불교 경전을 두루 통달하였으나,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했다. 설총의 일생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17) 신문왕 대에 높은 관직에 발탁되어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719년(성덕왕 18)에는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지었는데, 『삼국사기』를 쓸 당시에도 이미 설총이 지은 글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단지 『삼국사기』에 실린 「화왕계(花王戒)」를 통하여 국왕에게 안일과 비행을 풍자하는 문학가적 면모와 맹가(孟軻, 孟子)와 풍당(馮唐)을 들어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할 것을 충간하는 유학자적인 면모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설총은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 삼문장(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불렸고, 『삼국유사』에서는 "경(經)과 사(史)에 두루 통달했다.(博通經史)"라고 하여 신라 십현(十賢)의 한 명으로 칭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설총은 불교의 경전도 능통하고 유교의 경전과 사서에도 두루 통달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그렇다면 설총의 학문은 어떤 성격을 가지며 그의 사상사적인 위치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설총이 쓴 글과 설총에 관한 당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설총 학문의 내용과 성격을 분명히 알 수는 없다. 현재 남아있는 김부식(金富軾, 1075 1151)의 『삼국사기』(1145)와 일연(一然, 1206 1289)의 『삼국유사』 등 후대의 기록을 통해 추론해 볼 수밖에 없다.(18)
    먼저 설총의 유학은 기본적으로 한당유학(漢唐儒學)의 범주에 드는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공자 맹자가 활동하던 춘추전국시대의 유학은 한나라때 관학으로 채택되었다. 한대에 관학으로 채택된 유학은 황제의 지배권을 뒷받침하는 지배 이념으로서 정치 기술 즉 유교적인 정치 제도를 갖추어서, 당대에 이르러 유교적 정치제도를 완비하였다.(19)
    한당유학은 황제의 절대 권력과 연결되어 통일국가에 질서와 통일의 원리를 제공하였다. 유교 경전에서 제공하는 충, 효 등의 인륜 도덕과 정치 규범은 통일국가의 전제 황권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을 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통일국가의 입장에서 경전 해석을 통일한 공영달(孔潁達)의 오경정의(五經正義)가 만들어지며, 이와 함께 삼성육부제(三省六府制) 등 유교적인 통치제도가 완성되었다.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까지의 유학은 기본적으로 한당유학이었다. 통일신라도 당으로부터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제공하는 유교적 정치이념과 제도를 받아들였다. 공영달의 오경정의가 신라에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오경정의가 간행되었음은 확인된다. 통일 신라의 유학이 한당유학이었으므로 설총의 유학도 기본적으로 한당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한당유학에서 보이는 학술적 특징의 하나는 훈고학(訓誥學)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유교의 경전이 없어진 후, 한대에는 멸실된 경전을 찾아내어 정리하고 위서들을 변별하는 작업이 훈고학으로 발달하였다. 후한 말의 정현(鄭玄)의 오경주(五經注)는 이러한 한대의 훈고학을 집성한 것이었다. 정현의 오경주가 삼국 또는 통일신라에 들어왔는지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통일신라시대 유학이 경전의 구절과 글자의 의미를 새기는 훈고학적인 학풍이었음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설총이 "방음으로 중국과 동방의 지방 풍속과 사물 이름을 막힘 없이 알았고, 육경과 문학을 훈해하였다.(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라고 한 것은 설총의 학문이 훈고학적인 학풍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이 한창 고조되는 시기에 설총은 경전의 해득에 필요한 지방의 풍속, 사물의 이름 등에 대한 훈고학적인 지식에 가장 밝았고, 그러한 훈고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유교 경전을 풀이하여 국학에서 후생들을 교육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설총의 학문을 훈고학이라고 규정하기도 하였다.(20)
    설총은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기에 훈고학적인 방법으로 한당유학의 경전을 해석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방언으로 구경을 읽었다(以方言讀九經)"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육경과 문학을 훈해하였다(訓解六經文學)"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설총이 한당유학의 경전을 신라말로 해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의 구경과 『삼국유사』의 육경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전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21), 유교의 경전을 통칭한 것으로 보인다. 설총이 풀이했다는 유교 경전은 한당유학에서 중시한 오경, 삼례, 춘추삼전, 『논어』, 『효경』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22)
    그런 점에서 설총은 유학의 경전을 훈고학적인 방법에 의해 우리말로 풀이한 최초의 유학자라 할 수 있다.
    설총의 경전풀이는 고려시대까지 전해졌다. 『삼국사기』에는 "방언으로 구경을 읽어 지금까지 학자들이 그를 종(宗)으로 삼는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 至今學者宗之)라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육경과 문학을 훈해하여, 지금까지도 해동(海東)에서 명경(明經)을 업으로 하는 자가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설총의 경전풀이는 『삼국사기』가 기록된 12세기 중반은 물론 『삼국유사』가 기록된 13세기 후반에도 통용된 것이 분명하다.
    설총의 경전 풀이 방법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국어학에 문외한인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원전의 행간에 묵서(墨書)로 기입하여 표기하는 훈독(訓讀)의 방법'이 아니었는가 추측된다.(23)  14세기의 『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에 이러한 표기법이 사용되고, 1465년에 간행된 『구결원각경』(口訣圓覺經)에도 이러한 표기법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표기법이 14세기의 훈독법이라면 『삼국유사』가 쓰인 13세기 후반까지도 "전수부절(傳受不絶)"한 설총의 유교경전 풀이법과 접점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유교경전과 불교경전의 차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기본적인 풀이 방법은 같았을 것이고, 불교와 유교 경전에 통달한 설총이 창안한 경전 풀이 방법이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일까? 설총이 유교 경전을 어떤 시각에서 해석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풀이하는 방법은 현존하는 불교 경전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설총의 유교 경전 풀이가 어떤 성격을 갖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리학이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통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과 같이 대체적인 추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289년에 안향이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후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경서를 해석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시작된다. 우탁이 처음으로 『주역』의 「정전」(程傳, 程子의 해석)을 해득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경전을 성리학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더욱 활발해진다. 고려 말에 정몽주가 처음으로 삼경에 구결을 붙여 해석하고, 조선 초기 태종 때 권근이 삼경에 토를 달아 해석하여 경연과 관학의 교재가 되었다. 그리고 세종 대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성리학의 경서인 사서(四書) 삼경(三經)에 토를 붙여 언해(諺解)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16세기 후반 선조 연간에 율곡 이이의 사서언해와 교정청의 사서삼경언해로 귀결되었다.(24)
    이와 같이 성리학이 들어온 이후 경서에 대한 성리학적 해석이 새롭게 이루어진바, 그 이전까지의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은 설총의 경전풀이가 통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문신귀족기에도 최충(崔沖, 984∼1068) 등에 의해 유학이 매우 발달했지만 경전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는 12세기 중반에도 "지금까지 학자들이 그를 종(宗)으로 삼는다.(至今學者宗之)"라고 하였다. 그 후 고려는 무신 집권과 몽고 침입으로 문신귀족기의 유학이 쇠퇴하는데, 13세기 후반에 쓰인 『삼국유사』의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傳受不絶)"는 표현은 그러한 저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설총의 경전풀이가 문신귀족기에는 "종(宗)"의 위치에 있었으나, 13세기 후반에는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는 정도로 의미가 축소되는 것이다.
    요컨대 설총의 경전풀이는 고려 중기 문신귀족기까지 절대적으로 통용되었으나, 무신 집권, 몽고 침입 등으로 유학이 쇠퇴하는 가운데 그 의미가 축소되다가, 고려 말부터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전혀 새로운 경서 해석이 시도되면서 설총의 경전풀이도 사라지는 것이다.
    한편 위의 "방언으로 구경을 읽었다(以方言讀九經)"는 『삼국사기』 기록과 "방음으로 중국과 동방의 지방 풍속과 사물 이름을 막힘 없이 알았고, 육경과 문학을 훈해하였다(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설총의 이두창제설로 발전되었다. 이승휴(李承休, 1224 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 1187)에는 "큰 선비 설총은 이두를 지어내어 속언과 향어로 과문(科文, 蝌蚪文字)과 예서(隸書)를 통했네."(25) 라고 하여 설총이 이두를 창제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거의 모든 기록에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1395) 발문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삼한 때에 설총이 방언문자를 지었는데 이도(吏道)라고 한다 ... 이 책을 이도로써 읽고 양능한 사람이 인도하는 것이 마땅하다."(26)라고 하였고,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1425)에는 "이문(吏文)을 지어 세상에 전하여 사람사람마다 쉽게 알게 하여 오늘까지 그에 의지한다."(27)라고 하였다. 정인지의 「훈민정음서」(訓民正音序, 1446)에는 "옛날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처음 만들어 관부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28)라고 하였다. 성종 때 만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6)에는 "이어(俚語)로 이찰(吏札)을 만들어 관부에서 행하였다."(29)라고 하였고, 영조 때 만든 『여지도서』(輿地圖書, 1755)와 기타 읍지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30)
    이러한 조선시대의 기록들로 인하여 설총이 이두를 창제했다는 설이 정설화되었으나 광복 이후의 국어학 연구들에서 설총이 이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정리 내지는 집성했다고 하는 설이 제기되었다. 국어학의 지식이 없는 필자가 여기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수는 없다.
    다만 이들 기록에서 주목되는 점은 설총의 이두가 통용된 하한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대명률직해』의 발문은 '설총이 만든 이두로 대명률직해를 읽게 한다'는 의미이니, 설총이 만든 이두로 『대명률』을 풀이했다는 말이다. 정인지의 「훈민정음서」와 『경상도지리지』에서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세종 대에도 관부와 민간에서 설총의 이두가 통용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종 대의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는 '지금까지 행해진다'는 말이 빠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을 만들 때 『경상도지리지』도 참고하였지만, "지금까지 의지한다(至今賴之)"란 말을 삭제한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후의 기록들에서는 '지금까지 행해진다'는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설총의 이두는 조선 초기 세종 대까지 관청과 민간에서 통용되다가 15세기 후반에는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관청과 민간에서 통용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국어학의 연구에 의하면, 『대명률직해』(1395)와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 1415)의 이두로 된 번역은 원문과는 거리가 있는 번역으로, 이 책들의 특징적인 문체는 후대의 이두문에는 전승되지만 한글에 의한 번역에서는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 또한 1541년의 『우마치료방』(牛馬治療方)도 이두와 한글에 의한 두 가지 번역을 실은 독특한 언해서로서, 이두문은 『대명률직해』와 『양잠경험촬요』에서 보이는 문체적 특징을 갖지만 한글 번역문은 다른 언해서와 같다고 한다.(31)
    이러한 국어학의 연구를 염두에 두면, 정인지의 「훈민정음서」에서 얘기한 "관부과 민간에서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관부에서 행해지는 것은 『대명률직해』를 말하는 것이고, 민간에서 행해지는 것은 『양잠경험촬요』, 『우마치료방』 따위의 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건국 후 법전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을 때에는 『대명률』을 직해하여 법률서로 원용하다가 성종 대에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하였다. 그 이후에는 『경국대전』이 통일법전으로 사용되었으며, 『대명률직해』도 조선 말기까지 이용되었으나 『경국대전』을 보완하는 법률서로 상대적인 중요성은 약화되었다. 또한 민간 생활에 필요한 양잠서, 가축 치료서 등에는 고려시대의 언어 풍습이 상당 기간 남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책들에서 보이는 이두문의 특징적인 문체라는 것은 설총의 이두로 기록된 것이며, 그러한 설총의 이두식 문체가 세종 대 한글 창제 후 점차 사라지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16세기 중반의 『우마치료방』은 종래 설총의 이두식 문체와 한글창제 이후의 한글번역체가 뒤섞여 나타나는 과도기적인 표기법으로 볼 수 있겠다.
    지금까지 설총의 경전 풀이와 이두를 구분하여, 설총의 경전 풀이는 성리학이 들어오기 이전까지 통용되었고 설총의 이두는 세종 대 무렵까지 관청과 민간에서 통용되었다고 추론해 보았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설총은 한당유학을 한국적으로 수용하는 데 크게 기여한 유학자였다. 원효가 불교를 한국화(신라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듯이, 원효의 아들인 설총은 유교 경전을 우리 식으로 풀이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한당유학을 한국적으로 수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설총의 유교경전 풀이는 성리학이 들어오기 이전까지 통용되었고, 설총의 이두는 조선초기 훈민정음이 창제될 때까지도 쓰였다. 그런 점에서 설총의 업적은 한당유학이 들어온 후 유교 경전을 우리 식으로 풀이한 것으로, 성리학이 들어온 후 교정청에서 사서 삼경을 언해한 것에 해당하는 공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32)

Ⅲ. 설총에 대한 인식의 변화
    1. 설총의 문묘 종사
    문묘는 국가의 유교 이념을 상징하고 학자들의 준칙을 삼기 위하여 공자를 모신 국가의 사당이다.(33)  중국에서는 공자의 고향에 궐리사(闕里祠)가 있었는데, 위(魏)나라 때 수도에 공자 사당을 두었고 당나라 때 국학에 문묘(文廟)를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의 성덕왕 16년(717)에 당나라에서 공자와 10철, 72제자의 화상을 가져와 국학에 모신 바가 있지만, 문묘의 제도는 고려시대에 갖추어졌다.
    문묘에는 공자 외에도 공자의 제자와 유학에 공이 큰 학자들을 종사했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도 문묘에 종사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총 18명의 유학자를 문묘에 배향하였다.(34)  문묘에 종사된 18명 중 정몽주 이후의 학자들은 모두 조선시대에 성리학적인 기준에 따라 학문과 공업(功業)을 헤아려 배향된 인물로서, 고려시대에는 1020년에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을 배향하고 1022년에 설총을 홍유후(弘儒侯)로 봉하여 배향하였으며, 1319년에는 안향을 배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인 기준과 엄격한 절차에 따라서 "유교에 공이 있고, 치도(治道)에 도움이 된 문신"(35) 을 문묘에 종사했으나, 고려시대에 설총과 최치원이 문묘에 종사된 공식적인 사유는 명확하지 않다. 혹설에 최치원은, 신라가 멸망하기 전에 왕건에게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은 푸른 솔이라(鷄林黃葉 鵠嶺靑松)"는 글귀를 보내 고려의 통일을 예언했기 때문에 맨 먼저 문묘에 종사되었다고도 한다. 설총은 홍유후에 봉하고 문묘에 종사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36) 문묘 종사의 사유와 과정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최치원은 문장으로, 설총은 방언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고 하였다.(37)
    『삼국사기』 권 46, 열전 6에는 강수, 최치원, 설총의 순서로 신라의 대표적인 유학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강수는 문묘에 배향되지 못했고 최치원과 설총은 차례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렇다면 왜 강수는 배향되지 못하고, 최치원과 설총만이 문묘에 배향되었을까?
    강수도 신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였지만 당시의 외교 정치에 기여한 인물로 후세에 끼친 학술적 영향은 크지 않았다. 이에 비해 최치원은 그의 문인이 고려시대의 귀족층에 상당수가 있었고,(38)  설총은 고려 문신귀족기까지도 그의 경전풀이로 학자들의 "종(宗)"으로 추앙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이 한창 발달한 문신귀족기에 설총과 최치원은 문묘에 배향되었지만 강수는 배향되지 못했던 것이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설총은, 그의 학문을 잇는 문인들이 사승관계를 이루며 배출되지는 못했지만, 경전풀이로 고려의 문신 유학자에게 학술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1022년에 문묘에 배향된 이래 조선 말기까지 중앙의 성균관과 각 지방의 향교에서 국가와 학자들의 제사를 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2. 조선시대의 설총에 대한 평
    13세기말 성리학이 들어온 후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성리학적 학문을 추구함에 따라 종래의 한당유학적인 경향은 성리학으로 대체되어 갔다. 성리학에서는 사장학보다는 의리학을 중시하였으며, 한당유학의 훈고적 경전 해석을 배격하고 이기론으로 경전을 해석하였다. 또한 한당유학에서는 오경이 중심이었으나, 성리학에서는 주자가 주(註)를 붙인 사서 삼경이 중요시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 오면 설총의 학술적 영향력은 소멸해 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리학적인 경서 해석이 이루어짐에 따라 설총의 경전풀이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고, 세종 대 한글창제를 전후하여 설총의 이두식 문체도 점차 소멸되어갔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설총이 문묘에 종사된 학자로만 언급될 뿐 설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조선 초기에는, 설총과 최치원 등이 문풍을 진작하고 세도를 유지하는 데 공이 크며, 우리나라 문묘에 종사되기에는 충분하다고 평가되기도 하였다.(39)
    그렇지만 조선 중기에 성리학적인 학풍이 깊어짐에 따라, 인물과 학문을 평가하는 데 도학(道學)의 기준을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문묘 종사된 설총, 최치원, 안향 등에 대해서는 도학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대체로 폄하하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선조 연간에 사림파 학자들이 오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문묘종사를 청할 때, "최치원, 설총, 안향은 조광조보다 못한 데도 문묘에 종사되어 과분한 예를 받고 있다."라고 비평되었고(40), 심지어 "덕은 중등(中等)을 벗어나지 못했고 공은 소소한 데 불과했다."(41) 라고까지 폄하되었다. 성리학의 도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한당유학의 학풍이었던 설총과 최치원 등은 그다지 높이 평가될 수 없었던 것이다.
    퇴계 이황의 다음 글은 신라의 유학과 설총 등에 대한 성리학자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라와 고려의 유학자는 끝까지 언어와 문장 따위를 중시하였는데, 고려 말에 정자 주자의 글이 점차 들어와서, 우탁과 정몽주같은 사람들이 성리설을 연구할 수 있었다. 조선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반사한 사서오경대전 성리대전 등의 책이 들어오고, 과거에서 선비를 취할 때도 사서 삼경을 통한 자를 뽑았으니, 이로부터 선비들이 외워 익히는 것이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말이 아닌 것이 없었다.(42)

이러한 도학적 인식에서 중국의 사신에게 한국의 유학자를 소개할 때, 최치원, 설총, 최충, 안향, 이색, 권근 등은 제외하고 우탁, 정몽주, 길재, 윤상,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김안국, 이언적, 서경덕 등만 소개했던 것이다.(43)
    조선시대에는 설총이 문묘에 종사되었을 뿐 설총의 학문은 학술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하였고 성리학자에게 추앙되지도 않았다. 이제 설총의 학문은 현실적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이다.
    한편 설총을 모신 서원으로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이 있다. 서악서원은 1561년에 경주부윤 이정(李楨)이 서악정사를 세워 설총, 김유신, 최치원을 모신 서원이다. 서원의 정문인 도동문(道東門)과 영귀루(詠歸樓), 강당인 시습당(時習堂), 동재인 진수재(進修齋), 서재인 성경재(誠敬齋) 등은 퇴계 이황이 이름한 것인데, 1623년에 서악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44)  서악서원은 설총을 모신 유일한 서원이었다.
    또한 설총은 경주 설씨의 시조로서 숭앙되었고, 현재에도 설총의 본향인 경상북도 경산에는 원효와 설총에 관한 유적과 설화 등이 남아 있다.(45)  한당유학의 토착화에 기여한 설총은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역사적인 자취를 뒤로 한 채 일족의 시조로서, 또 지방의 유적에 얽힌 설화로서만 오늘날의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Ⅳ. 맺음말
    신라는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였으나, 통일을 전후한 무렵에는 유교적인 정치이념과 제도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그리하여 통일기에 오면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는 유교 이념이 더욱 강화되어 왕명도 유교식으로 쓰는 시대로 전환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유학도 한 단계 발전하였다. 국학을 세워 유학에 의해 인재를 양성하고,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유교 경전의 습득 여부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였다. 이에 따라 유학적 기풍은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통일 직후 유학적 기풍이 한창 고조되는 시기에 설총과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었으니, 설총은 유학의 경전을 해석하여 유학이 학술적으로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설총의 유학은 기본적으로 한당유학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기에 훈고학적인 방법으로 한당유학의 경전을 해석하였다. 설총은 경전의 해득에 필요한 지방의 풍속, 사물의 이름 등에 대한 훈고학적인 지식에 가장 밝았고, 그러한 훈고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유교 경전을 풀이하여 후생들을 교육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총은 훈고학적인 방법에 의해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풀이한 최초의 학자라 할 수 있다.
    설총의 경전풀이는 고려 중기 문신귀족기까지 절대적으로 통용되면서 학자들이 "종(宗)"으로 삼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신 집권, 몽고 침입 등으로 유학이 쇠퇴하면서 그 의미가 축소되다가, 고려 말부터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경서 해석이 시도되면서 설총의 경전풀이도 역사적 소임을 다하였다. 또한 설총의 이두도 조선 초기 세종 대까지 관청과 민간에서 통용되다가 15세기 후반에는 소멸되었다. 설총의 경전풀이가 고려시대까지 통용되고 설총의 이두가 한글 창제 무렵까지 쓰였으니, 설총이 한국 사상과 문자 생활에 끼친 영향력은 심대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설총의 학술적 영향력으로 고려시대에는 설총을 문묘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이 발달함에 따라 설총을 비롯한 신라 유학자는 그다지 높이 평가받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설총의 경서풀이가 소멸된 가운데 설총의 학문은 주목받지 못했고 설총도 더 이상 추앙되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설총은 신라시대에 한당유학을 한국적으로 수용하는 데 크게 기여한 유학자였다. 원효가 불교의 한국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음에 비해, 원효의 아들인 설총은 한당유학의 경전을 우리말로 풀이하여 유교 경전을 익히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설총의 경서풀이는 한당유학적인 학풍이었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통용되었으니, 한국유학 사상사에서 설총은 교정청의 성리학적 경서언해에 해당하는 사상사적인 위치를 점한다고 평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