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의 「달」을 보며
―사개틀린 고풍의 툇마루


권영민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김영랑의 시집을 읽다보면 가끔 재미있는 언어 표현이 등장한다. 호남 지역의 방언을 시어로 훌륭하게 살려낸 것도 많다. 지금은 별로 쓰지 않는 고유어들을 적절하게 활용한 언어 감각도 뛰어나다. 그래서 나는 가끔 김영랑의 첫 시집 『영랑시집』(1935)을 펼쳐 놓고 시를 읽는다. 이 초판본 시집에는 작품의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작품의 배열 순서대로 일련 번호를 달고 있을 뿐이다. 원래 신문이나 잡지에 시를 발표할 때에는 분명 제목이 붙어 있는 것들도 모두 그 제목을 그대로 표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해방 직후에 나온 『영랑 시선』에서는 다시 각각의 작품에 제목을 표시하고 있다.
    김영랑의 시들을 온전히 원래의 모습대로 읽어볼 수 있는 시집은, 이 두 가지의 판본을 제외하고는 없다. 김영랑이 세상을 떠난 후에 만든 대부분의 시집들은 앞의 두 시집 초판본의 어휘나 표기를 함부로 바꿔놓아서 원문의 감흥을 해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출판 풍토에서 볼 수 있는 옳지 않은 관행이지만, 무엇보다도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작품의 원문이 하나의 판본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거나 판본 연구 자체의 중요성에 무관심했던 데에서 비롯된 일이다.
    국어의 표준어가 제대로 정해지지 못했고, 표기 방법도 정비되지 않았던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은 시인마다 어법이 다르고 작품에 따라 그 표기가 달라진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같은 작품들을 정리하면서 그 어휘를 표준어로 바꾸고 표기 방식을 맞춤법에 따라 고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시인의 독특한 어조를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우리 근대시 연구에서는 이른바 본문 비평 또는 텍스트 비평이라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2.

최근에 내가 읽은 김영랑의 작품 가운데 <달>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그 감각적인 표현은 매우 놀랄 만하다. 김영랑의 첫 시집 『영랑시집』에 제목 없이 수록되었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개틀린 古風의퇴마루에 업는듯이안져
아즉 떠오르는긔척도 업는달을 기둘린다
아모런 생각업시
아모런 뜻업시

이제 저 감나무그림자가
삿분 한치식 올마오고
이 마루우에 빛갈의방석이
보시시 깔니우면

나는 내하나인 외론벗
간열푼 내그림자와
말업시 몸짓업시 서로맛대고 잇스려니
이밤 옴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영랑시집 49, 1935)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시적 이미지의 표현이다. 전체 3연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에서 시적 감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달'이라는 시적 대상이다. 제1연에서 시적 주체가 되고 있는 '나'는 툇마루에서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이같은 시적 정황은 자연스럽게 제2연과 제3연으로 이어지면서, 떠오르는 달의 모습으로 시선이 옮겨진다. 그러나 여기서 정작 그려지는 것은 달이 아니다. 감히 어찌 달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제2연의 경우, 시적 주체에 의해 감지되는 것은 달빛에 따라 조금씩 마루 위로 얼비치는 '감나무 그림자'이다.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그 빛에 따라 옮겨지는 그림자를 통해 그려보이는 놀라운 감각은 모두 이미지의 표현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제 저 감나무그림자가 / 삿분 한치식 올마오고 / 이 마루우에 빛갈의방석이 / 보시시 깔니우면'에서 떠오르는 달과 그 달빛이 빚어내는 감나무 그림자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으로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정(靜)함 가운데 동(動)이라고 했던가.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빛의 움직임을 이처럼 섬세하게 포착해낸 경우를 우리는 달리 찾아보기 힘들다.
    제3연은 시적 주체인 '나'의 모습을 '간열픈 내그림자'와 함께 보여준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마지막 행의 표현이다. '이밤 옴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청각적으로 간취하는 놀라운 시적 감각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이제 밤은 깊어가고 달은 중천에 떠 있는데, '나'는 감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툇마루에 홀로 앉아 '나'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3.

김영랑의 시 <달>의 첫 행은 '사개틀린 古風의퇴마루에 업는듯이안져'라고 표기되어 있다. 바로 이 대목이 문제를 일으킨다. 첫 어절인 '사개틀린'을 잘못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 출간된 시집들은 대개 이 부분이 '사개를 인'이라고 고쳐져 있다. 이것은 원문의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잘못된 표기이다. 단어의 뜻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그 말의 쓰임에 맞지 않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사개틀린'이라는 말은 하나의 단어가 아니다. 굳이 띄어쓰기를 한다면 '사개 틀린'이라고 띄어쓰는 것이 옳다. '사개 틀린'이라는 구절은 이 시에서 무슨 대단한 시적 의미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낡고 헐어진 툇마루를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사개틀린'이라는 말은 원래 목공(木工)에서 자주 쓰고 있는 '사개'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어대사전』(이희승편)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사개: (1) 상자 같은 것의 네 모퉁이를 요철형으로 만들어 끼워 맞추게 된 부분.
(2) 기둥머리를 도리나 장여를 박기 위해 네 갈래로 오려낸 부분.

목재를 이용하여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 때, 그 이음새 부분이 서로 맞물려 움직이지 않도록, 요철 형으로 깎아낸다. 바로 이 요철 형으로 깎아낸 이음새 부분을 '사개'라고 한다. 요즘에는 벽돌이나 콘크리트로 집을 짓기 때문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사개'를 물리는 것을 보기 힘들다. 책장이나 상자를 만들 때도 합판을 써서 간단히 귀퉁이에 못을 박아 고정시키거나 강력한 접착제로 붙여버리기 때문에 '사개'를 물려 모서리를 고정시키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그러니 이같은 말이 널리 쓰이지 않게 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고향에서 어른들이 하는 말씀 가운데 '사개가 맞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일의 이치가 제대로 맞거나 말의 앞뒤가 들어맞을 때 '사개가 딱 들어맞는다'고 표현한다. 문짝이나 상자를 만들 때, '사개가 제대로 딱 물려야' 그 틀이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고정되는 것을 보고 만들어낸 표현이다. 지금은 '사개가 딱 들어맞게' 말을 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이런 표현 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김영랑의 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시에서 '사개틀린'이라는 말은 '사개가 맞다'는 표현과 상반되는 의미를 나타낸다. 툇마루가 너무 오래되어 낡고 헐어서 마루판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의 이음새가 서로 어긋나 있음을 말한다. '사개가 딱 들어맞지 않고 뒤틀린' 툇마루라고 풀이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최근 출판된 시집들에서 '사개를 인'이라고 고쳐 놓은 것은 모두 다시 원문대로 바로잡아야만 한다.
    김영랑의 시와는 직접 관계가 없지만, '사개가 맞다'는 표현을 시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예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박용철의 시 <로만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용철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합치되는 것을 '둘이맘 다시 사개맞힘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쌓였든 눈이 어찌 단번에 슬림같이
애틋한정에 마음 녹아 흐르려나니
그대여 그대의 닷지운 정을 풀어놓아
용서의 넓은 바다우에 떠서 이리로 오라

두손 안고 얼굴 가만히 보랃으며
다만 할말은 그대여 나를 용서하라
둘이맘 다시 사개맞힘같이
어울려 놓는 사이에
나는 영원의 평화와 잠의 나라로 떠나 가련다.
--로-만스 (박용철시집 상, 6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