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寫眞'과 '活動寫眞, 映畵'

宋 敏 /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다게르의 사진 장치가 1839년 프랑스 학사원에서 발표되자, 정부는 그 특허권을 사들였다. 그 때부터 사진술은 상품화의 길을 걸어, 1850년대에는 일반화하기에 이르렀다(柏木 博 1999:209).
    사진술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1862년이었다. 이 해에 요코하마(橫濱)와 동경(東京)에는 사진관이 등장하여 막부(幕府) 말엽부터 명치(明治) 초기에 걸친 격동의 일본 사회를 사진으로 담았고, 지금 남아 있는 당시 인물들의 모습은 우에노(上野)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湯本豪一 1996:162). 최초의 사진관이 나가사키(長岐)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도 있으나(搥田滿文 1983:33), 그 연대에는 차이가 없다.
    신기한 존재로 여겨진 사진술을 처음에는 '寫眞の繪([syasin-no ye]=사진 그림)'로 불렀으나, 점차 '사진'으로 축약되기에 이르렀다. '사진'이라는 한자어는 문자 그대로 '진(眞)을 사(寫)한다'는 뜻이었으나, 막부 말기부터는 photograph의 대역어로서, '사진 장치로 찍은 화상(畵像)'을 뜻하게 되었기(惣鄕正明‧飛田良文 1986:212-213) 때문에, '사진'은 1860년대에 일본어에서 새로 태어난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사진 기기로 사진을 처음 찍어 본 사람은 1876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기수(金綺秀)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동경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숙소인 연료관(延遼館)에서 관반관(館伴官)의 일방적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사진을 찍었다.

"하루는 관반관이 와서 내 진상을 찍겠다고 요청하기에 재삼 거절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一日館伴官來見 要寫我眞像 再三却之 不余聽也)"(『日東記游』 卷一 留舘).

김기수는 '사진'을 '(내) 진상을 그린다(寫我眞像)'로 이해한 듯하다. 1870년대라면 이미 일본어에 '사진'이라는 신생 한자어가 명사형으로 자리를 굳힌 시기이므로 김기수는 현지에서 '사진'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알게 되었겠지만, 이를 명사형으로 쓰지는 않았다. 당시의 국어에는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명사형 '사진'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기수는 일본에서 '사진'이라는 단어와 그 개념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 한 가지 사례로서, 외무경(外務卿) 데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가 예조판서 김상현(金尙鉉)에게 보낸 예단(禮單)을 들 수 있다(『日東記游』 卷四 文事 回書契). 거기에는 '사진첩 이책(寫眞帖 二冊)'이라는 물목(物目)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후부터 일본에 파견된 조선 관리들은 빠짐없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1881년 신사유람단에 참여한 이헌영(李金憲永)은 엄령(嚴令=嚴世永), 심령(沈令=沈相學), 오위장(五衛將=金鏞元)과 함께 사진국에 가서 사진을 찍었으며(『日槎集略』 卷地 7월 3일), 1882년의 수신사 박영효(朴泳孝)는 세 번이나 사진국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처음은 고베(神戶)에서 부사(=金晩植)와 함께(『使和記略』 8월 21일), 그 다음은 오사카(大阪)에서 부사 김교리(=金晩植), 서종사관(=徐光範)과 함께(『使和記略』 8월 27일), 마지막은 동경에서 사진을 찍었다(『使和記略』 9월 15일).
    이헌영이나 박영효의 기록에는 '사진'이라는 단어가 명사형으로 쓰이고 있어, 1880년대 초에는 국내에도 '사진'이라는 신생 한자어가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진 기기를 처음으로 국내에 들여온 사람은 지석영(池錫永)의 형이며 서화가(書畵家)로도 이름이 알려진 지운영(池運永, 훗날 運英 또는 雲英으로 개명, 1852-1935)이었다. 그는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주사(主事) 직함으로 일본에 건너가 사진술을 익힌 후, 필요한 기자재를 국내에 들여와 마동(麻洞)에 사진관을 차렸다. 그 시기는 1885년 3월(양력 4월) 이후로 추정된다. 1884년 11월 갑신정변(1884년 10월 17일, 양력 12월 4일)의 뒷처리를 위하여 정사 서상우(徐相雨)가 일본으로 급파되었는데, 그와 동행했던 종사관 박대양(朴戴陽)의 기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지주사 운영이 찾아왔다. 운영은 작년 가을 사진 기기를 사러 들어왔다가 병이 들어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약값과 식비를 갚을 길이 없어 바야흐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추당장(秋堂丈=徐相雨)이 표(標=手票)를 주어 빚을 갚게 하고 함께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池主事運永來見 運永前年秋以寫眞器機購貿事入來 在病未歸 藥債食費無路淸償 方在困境 秋堂丈給標償債 許與同歸)"(『東槎漫錄』 1885년 음력 2월 초10일, 양력 3월 26일)

당시, 서상우 일행은 귀국하는 배를 타기 위하여 고베(神戶)에 머물고 있었다. 이 기록을 통하여 지운영이 일본에 파견된 것은 1884년 가을이었으며, 병이 드는 바람에 약값과 식비가 밀려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서상우의 주선으로 빚을 갚고 같은 배로 귀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2월 19일(양력 4월 4일), 그 이튿날에는 예궐 숙배(詣闕肅拜)가 행해졌다. 결국, 지운영이 사진관을 개설한 시기는 빨라야 1885년 3월(양력 4월) 이후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사진'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신생 한자어는 국어에도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 것이다.
    청일전쟁(1894-5) 이후 일본인들은 국내에 들어와 여러 곳에 사진관을 차렸다고 한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한영뎐』(1897)에도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표제어가 나타난다.

샤진(寫眞). A photograph; a portrait; a drawing, (박다), See 화본.
샤진(寫眞)다. To draw; to paint; to photograph; to take a portrait, See 화본내다.

명사형 '샤진'이나 동사형 '샤진다'는 다같이 전통적인 의미와 새로운 의미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초상화(를 그리다)'는 전통적인 의미, '샤진(을 박다)'는 새로운 의미에 속한다. 이는 '사진'이라는 전통적인 한자어의 의미에 새로운 개념의 의미가 추가된 결과로 해석된다. 새로운 의미의 추가는 당연히 일본어를 차용한 결과일 것이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 '사진'이라는 단어는 국어에 완전히 자리를 굳혔을 것이다. 정운복(鄭雲復)의 『독습일어정칙』(獨習日語正則, 1907)으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何時カ 暇ノ時分ニハ 寫眞取リニ往キマセウ/언제던지 한가에 寫眞박히러 가옵시다(66하단). 寫眞屋ニ 往ツテ 寫眞ヲ 一枚ツゝ取ラウデハ ゴザイマセンカ/寫眞집에 가셔 寫眞을 쟝씩박지안으랴오(188하단).

『한영뎐』에 '샤진다'로 나타났던 동사형이 이때에는 '사진(을) 박히다, 사진을 박다'로 쓰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따라서 현대국어의 '사진(을) 찍다'는 그후에 새로 생긴 표현일 것이다.
    사진술의 출현에 이어 19세기 말엽에는 이른바 '움직이는 사진'으로서의 '활동 사진'이 등장하였다. 일찍이 에디슨은 1889년 만화경식(萬華鏡式) kinetoscope(영사기)를 발명한 바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 사진'의 출발은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cinématographe(촬영기와 영사기)를 완성하여 공개하면서부터였다. 그 이듬해에는 에디슨이 또다시 vitascope(영사기)라는 장치를 발명하였고, 이어서 독일의 스클라다노브스키와 영국의 폴은 각기 독자적으로 bioscope(영사기)라는 장치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초기적 장치로서 에디슨의 kinetoscope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1896년 11월이었으며, 당시 고베(神戶)의 한 신문에는 처음으로 '활동 사진'이라는 말이 쓰였다고 한다. 이 신생 한자어의 출현에 대해서는 히로타 에이타로(廣田榮太郞 1969:141-149 「活動寫眞」から「映畵」へ)에 상세한 고증이 보이는데, 당시에는 '활동 사진' 이외에도 '사진 활동 기계, 사진 활동기, 사진 활동 목경(目鏡=眼鏡)'과 같은 명칭이 보인다고 한다.
    또한, 1897년 2월에는 cinematograph가 오사카(大阪)에서 공개되면서 '자동 사진'이란 말이 쓰였고, 같은 해 3월 동경 흥행 때에는 '자동 환화(幻畵)'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였다. 한편, 같은 해 2월에는 에디슨의 vitascope도 오사카에 들어왔는데, 이 때의 신문에는 '축동 사영회(蓄動射映會)'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거기에 '활동 사진'이라는 단어가 쓰였다고 한다. 같은 해 3월에는 또 다른 vitascope가 동경에서 공개되었는데, 그 신문 광고에는 '전기 작용 활동 대사진'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결국, '활동 사진'이라는 합성어는 kinetoscope, cinematograph, vitascope와 같은 장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번역어로서, 1897년경에는 이미 일본어에 정착된 신생한자어였다. 실제로 명치시대(1868-1912)의 각종 사전에는 cinematograph, kinematograph, vitascope, bioscope, biograph, animated photograph, living picture, moving picture, movie 등의 대역어(對譯語)로 '활동 사진'이 쓰이고 있다(惣鄕正明·飛田良文 1986:72-73).
    '활동 사진'이 국내에 전해진 것은 1900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1903년 6월에는 한성 전기 주식 회사(漢城電氣會社)에서 '활동 사진'을 상영하였으며, 1904년에는 영미 연초 회사(英美煙草會社)에서 '활동 사진'을 공개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후 1907년에는 한미 전기 회사(韓美電氣會社)가 동대문 차고에 '활동 사진 관람소'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정운복(鄭雲復)의 『독습일어정칙』(獨習日語正則, 초판은 1907년 9월 20일 발행)에 '활동 사진'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東大門內ニ 活動寫眞ガ アルサウデスガ 一度 見物ニ 往カウヂヤ アリマセンカ/東大門內에 活動寫眞이 잇다니 한번 구경가지 안으랴오(189하단).

이 사실로 볼 때 '활동 사진'이라는 신생 한자어는 통감부 시대(1905-1910)에 이미 국어에 정착된 단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어가 일본어에서 차용된 결과임은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을 것이다.
    한편, 일본어에서는 '활동 사진'이라는 명칭이 다시 '영화(映畵)'로 바뀌었는데, 그 시기는 1920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廣田榮太郞 1969:155-156). 이에 따라 국어에서도 '활동 사진'과 함께 '영화'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실상은 1930년대까지도 지속되었다. 이극종(李鍾極)의 『선화양인(鮮和兩引) 모던 조선어외래어사전』(漢城圖書株式會社, 1937)에서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키네마[kinema] 活動寫眞, 映畵, 씨네마. 活動寫眞館./키네마·칼(컬)러[kinema-colour] 天然色活動寫眞, 原色映畵./키네마토그랲[kinematograph] 活動寫眞機, 映寫機, 活動寫眞.
    키네마트(츠)르기[Kinematurgie(獨)] 映畵學, 映畵論./키네마·팬[kinema fan] 映畵愛好者, 映畵狂.
    키네마·푸로덬슌[kinema production] 映畵製作(所)./키네토폰[kinetophone] 發聲活動寫眞(機).
    키노[kino(露)] 映畵, 키네마.

또한, '영화'와 '활동 사진'이라는 단어는 문세영의 『조선어사전』(1937)에도 표제어로 올라있다.

영화(映畵) 활동사진의 그림.
활동사진(活動寫眞) 눈의 환각(幻覺)을 이용하여 계속적으로 잇대어 나오는 사물의 활동 상태를 영사하는 환등의 한 가지. 키네마.

결국, 영상 매체의 명칭인 '사진, 활동 사진, 영화'는 어느 것이나 개화기의 일본어에서 순차적으로 창안된 신생 한자어일 뿐 아니라, 이들은 각기 국어에도 그때그때 차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 고 문 헌
*전번 호까지 이미 제시한 문헌은 생략함.
宋 敏(2000). 『明治初期における朝鮮修信使の日本見聞』(國際日本文化硏究センタ一 第121回フォ一ラム. 1999. 9. 7.).
柏木 博(1999). 『日用品の文化誌』(岩波新書 新赤版 619). 岩波書店.
槌田滿文(1983). 『明治大正の新語·流行語』. 角川書店.